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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의 봄 2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2

두바퀴인생 2013. 4. 7. 05:02

 

 

 

강남의 봄 2 : 바람따라 세월따라, 한민족의 서사시......2

 

 

                                                 새벽 달

 

고구려의 함성, 동북아 패자의 융성과 영광, 그리고 멸망 

 

고구려(高句麗, 기원전 37년경 ~ 668년)는 백제, 신라와 함께 삼국 시대의 고대 국가 중 하나이다.(하지만 고구려는 삼국시대 이전인 철기시대의 많은 국가중 하나이다.) 지역적으로는 현재의 만주한반도 북부를 약 700여 년 동안 지배했던 국가이다. 장수왕 이후 국호를 고려(高麗)로 변경했으나, 고구려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고구려는 전성기 때 대한민국의 대부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전역, 중국랴오닝 성, 지린 성, 헤이룽장 성 일부 (일명 만주), 러시아 일부 (프리모르스키 크라이 (연해주) 일부)까지 지배하였다. (록둔도 포함)

 

고구려는 기원전 37년 주몽이 이끄는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 지류인 동가강(佟佳江) 유역에 건국함으로써 성립되었다. 고구려는 초기부터 한족(漢族)과의 투쟁 과정을 통해 강대해졌다. 1세기 태조대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중앙집권국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태조대왕은 동예와 옥저를 복속시키고, 낙랑군과 현도군을 압박하여 영토를 넓혔다. 고국천왕은 왕위의 부자상속제를 마련하였고, 5부의 행정구역을 설정하는 등 체제 정비를 단행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되었다.

 

머슴에서 왕이 된 미천왕은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군대방군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 땅을 회복하였다. 고구려는 고국원왕백제전연의 공격으로 왕이 사망하는 등 일시적인 국가적 위기를 겪었으나, 소수림왕 대에 들어서 고구려는 태학(太學)을 설립하고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였으며, 율령을 제정함으로써 중앙집권국가를 완성시키고 다시 나라를 정비하였다.

 

5세기, 고구려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광개토왕은 백제의 수도인 한성(漢城)을 침공하여 남쪽 영토를 임진강과 한강까지 확장시켰고, 신라내물왕을 원조하여 왜구를 격퇴하였다. 또한 북으로 후연을 쳐서 요동을 완전히 차지하고, 아울러 요서 지방의 일부까지 진출하였다. 광개토왕은 숙신동부여를 복속시켜 만주와 한반도에서 우월한 위치를 확보하였다.

 

그의 아들인 장수왕은 중국의 남북조와 통교하였고, 유연(柔然) 등 새외(塞外) 민족과도 통교하면서 외교관계를 확대하여 중국을 견제하였다. 427년 남하정책의 일환으로 안학궁대성산성으로 천도하여 중앙 집권적 정치기구를 정비하였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한성을 침공하여 함락하고 개로왕을 죽여 고국원왕의 한을 풀고 남쪽의 아산만(牙山灣)까지 지배하였다. 이때 백제는 수도를 웅진으로 옮겼고, 함께 공격당한 신라는 죽령(竹嶺) 이북의 땅을 잃었다.

 

6세기 중반에 들어서 내우 외환에 시달리던 고구려는 국력이 크게 쇠약해졌다. 신라의 진흥왕나제동맹(羅濟同盟)을 깨고 고구려에게서 빼앗은 한강 유역을 독차지 하였으며, 지금의 함경도 지역 일부에까지 진출해 고구려를 압박하였다.

 

589년 중국에 새로 들어선 수나라는 고구려를 4차례에 걸쳐 침공하였다. 고구려-수 전쟁에서 고구려는 612년 을지문덕이 이끈 살수 대첩과 같은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 전쟁은 수나라의 멸망의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곧이어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태종연개소문의 대당강경책을 구실로 고구려를 침입하여 요동성 등을 함락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으나 안시성에서 성주 양만춘(楊萬春 혹은 梁萬春)에게 대패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는 중국 세력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으나, 공격을 받으며 국력이 쇠퇴해갔다. 특히 연개소문 사후 지배층이 분열되어 정치 상황이 어지러웠고 민심이 혼란해져 있었다. 668년 나당연합군은 혼란해진 고구려를 공격하여 수도인 평양을 차지하고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고, 고구려 영토의 일부는 신라로 들어갔다. 그러나 고구려의 공백은 후일 그 계승국인 발해로 이어진다.

 

건국

초기 고구려는 부여한군현(漢郡縣)과의 투쟁 속에서 성장하였고, 비옥한 영토를 차지하기 위해 적극적인 정복 활동을 벌였다. 또한 이러한 과정 속에서 고구려는 왕족인 계루부(桂婁部)를 포함한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등 다섯 부족으로 이루어진 연맹 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1세기 초부터 이미 왕호를 제정하고 예(濊)와 한(漢)의 창해군(滄海郡)을 없애고, 기원전 75년 한의 속현인 현도군을 압록강 유역에서 몰아내는 등 부족 연맹체를 굳혔다.

 

고구려는 이후 본격적인 고대 국가로서 건국하게 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에 따르면 기원전 37년 부여계인 동명성왕(東明聖王)이 졸본(卒本)에 도읍해 나라의 이름을 고구려로 한 것이 기원이며, 《위서(魏書)》에 따르면 흘승골성(紇升骨城)에 도읍했다 한다. 그러나 이규보의 〈동명왕편(東明王篇)〉에 언급된 건국 신화 혹은 그 이후의 여러 가지 정황에 의해, 고구려는 멸망한 고조선(古朝鮮) 및 부여(夫餘) 출신의 유이민과 그 지역의 토착 세력이 결합해 이뤄진 국가로 추정되는 등, 건국연대가 더 높았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시되기도 한다. 3년에는 국내성(國內城)으로 천도하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성장

53년에 즉위한 태조대왕(太祖大王) 때에 이르러 고구려의 5부족은 중앙 행정 단위인 5부로 통합되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내부 자치권을 제외한 군사권과 외교권이 에게 귀속되는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옥저(沃沮)를 복속시키는 등 고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고, 따라서 고구려의 진정한 건국은 태조대왕 때로 본다. 그는 주위의 여러 부족을 정복하여 동으로 옥저·동예(東濊)를 공격하고, 남으로는 살수(薩水)에 미치고, 북으로는 부여(夫餘)를 압박하고, 서로는 한의 요동군·현도군과 대립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고구려는 고대 정복국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태조대왕 이후에도 각 부족은 서서히 중앙 귀족으로 흡수되었고, 197년에 즉위한 산상왕(山上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의 형제상속이 배제되고 부자상속제가 확립되어 왕권이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왕권 강화의 배경에는 영토 확장이 있었는데, 기본적으로 약탈 경제 위주였던 고구려가 동해안의 옥저를 복속시키고 한군현에 대한 약탈을 행하면서 경제적으로 성장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244년 위나라(魏)의 관구검(毌丘儉)이 침공하면서 일시적으로 위축되었다.

 

빈농이 늘어나고 귀족의 노예가 되는 자유민이 증가하자, 고국천왕(故國川王) 때의 명재상 을파소(乙巴素)는 194년에 진대법(賑貸法)을 실시하여 빈농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다.

 

한편 후한(後漢) 말기에 중국이 3국으로 분열되어 혼란했던 시기, 요동 일대는 공손씨(公孫氏)의 세력권에 있었다. 북부 중국의 (魏)가 공손씨를 정복하고, 그 세력이 동쪽으로 뻗쳐오자 242년에 고구려 동천왕(東川王)은 압록강 어귀의 서안평(西安平)·구련성(九連城) 지방을 공략했다. 그 2년 뒤에 위나라 장군 관구검의 침입을 받아 싸웠으나 마침내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어 동천왕은 옥저로 피난 간 일이 있다.

 

4세기에 이르러 중국이 오호 십육국 시대로 혼란해짐을 틈타 고구려의 정복 활동이 활발하게 재개되었는데, 미천왕(美川王)은 위(魏)를 이은 진(晋)의 세력이 미약해진 틈을 타서 311년에 서안평을 점령하고 뒤이어 낙랑군(樂浪郡) 및 대방군(帶方郡)을 복속시킴으로써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였다. 이로써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 지역을 벗어나 대동강 유역을 차지하게 되어 경제적인 자원을 풍부히 얻게 되고 남쪽의 백제 등과 국경을 맞대게 되어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아직 지방의 흩어져있는 힘을 조직적으로 통합하지 못하여 그 다음 왕인 고국원왕 치세인 342년에는 선비족 모용씨가 세운 전연(前燕)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수도가 일시적으로 함락되고, 371년 백제 근초고왕의 침공으로 인해 왕이 전사하는 등 큰 국가적 위기를 맞았다.

 

융성

백제와 북방 민족의 양면 협공을 견디던 고구려는 소수림왕(小獸林王)때에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의 내부적인 개혁을 통해 고대 국가의 체제를 완성하고 중흥을 시도하였다. 소수림왕은 372년 전연(前燕)을 멸망시킨 전진(前秦)과 우호관계를 맺고 새로 전래된 불교를 받아들여 이를 국가적인 종교로 삼게 되고, 태학(太學)을 세워서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기관으로 삼았다. 한편으로는 율령(律令)을 반포하여 집권적인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가 국가체제를 정비하던 시기는 바로 백제가 평양성을 공격했던 근초고왕(近肖古王) 때로, 전성기를 이룬 시기였다.

 

 

광개토왕릉 비문 탁본

 

 

이를 기반으로 하여 5세기 광개토왕(廣開土王)과 장수왕(長壽王) 대에 이르러서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을 꾀하여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다. 391년 광개토왕이 즉위한 후 고구려는 서쪽으로 후연(後燕)을 공격하여 요동을 모두 차지하고 요서의 일부 또한 확보하였으며, 이어서 등장한 북연(北燕)과도 친선관계를 수립하였다. 북쪽으로는 부여 및 숙신(肅愼), 비려(碑麗)를 복속시켰으며, 남쪽으로는 백제를 쳐서 한강 이북을 빼앗아 위축시키고, (倭)와 가야(伽倻)의 침공을 계기로 신라를 보호국화하는 한편 바다를 건너 침공해 온 를 섬멸했다. 또한 가야를 공격하여 전기 가야 연맹을 해체시키기에 이르렀다. 동으로는 읍루(挹婁)를 정벌하였고, 동예(東濊)를 완전히 병합하였다. 또한 광개토왕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를 써서 중국과 대등함을 과시했다. 그의 업적은 지금의 만주 통구(通衢)에 있는 거대한 광개토왕릉비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413년에 즉위한 장수왕 때에는 대흥안령 일대의 초원 지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편, 중국 대륙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면서 대립하고 있던 두 세력을 조종하는 다면(多面) 외교 정책을 써서 중국 대륙을 견제하였다. 또 427년(장수왕 15)에 안학궁대성산성으로 수도를 옮겼고, 이에 백제는 큰 위협을 느껴 같은 처지에 놓여 있는 신라와 433년에 동맹을 맺어 고구려 세력에 대항코자 하였다.

 

고구려의 압력을 피할 수 없게 된 백제의 개로왕(蓋鹵王)은 북중국의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위군의 내원(來援)을 청한 일까지 있었다. 이에 장수왕은 승려 도림(道琳)을 백제에 간첩으로 보내어 경제적 혼란을 일으킨 다음 교묘히 백제 침공의 태세를 갖추었다. 475년 고구려는 백제의 수도 한성(漢城)을 함락하였고, 이와 함께 신라를 쳐서 죽령(竹嶺)까지 차지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히는 적극적인 남하 정책을 펼쳤다. 이와 같이 계속된 대외 팽창으로 고구려는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고구려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차지하고 정치 제도를 완비한 강대국을 형성하여 중국의 제국들과 거의 대등한 지위에서 힘을 겨루게 되었다.

 

고구려는 경상북도 영주시, 안동시, 청송군, 영덕군, 포항시, 의성군, 영양군, 울진군, 문경시, 상주시, 군위군, 봉화군까지 차지하고 대구광역시 근처까지 내려왔다.

 

쇠퇴와 멸망

무용총 수렵도.

 

 

고구려는 6세기 들어 점차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원왕(安原王) 때에 이르러서는 왕위 계승을 놓고 왕족들 간에 내전이 벌어졌다. 이러한 내분을 틈타 551년 백제와 신라가 연합군을 조직하여 대대적인 고구려 침공을 감행, 한강 유역을 점령하였다. 동일한 시기에 북쪽에서는 돌궐(突厥)이 발흥하였다. 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신라와 백제 간 동맹을 깨트리는 한편, 돌궐의 침공에 대항하였다. 돌궐과의 전쟁이 교착 상태에 이르자 고구려는 다시 한강 유역을 수복하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隋)나라가 중국 대륙을 통일하고 고구려에게 복속을 강요했는데 고구려가 이를 완강히 거부하자, 598년, 612년, 613년, 614년에 각각 침공하기에 이른다. 598년 수나라의 초대 황제인 수 문제는 고구려가 임유관을 선제 공격하자 이를 계기로 30만 육군과 10만 수군을 보내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하지만 요동에 다다르기도 전에 장마로 인해 돌림병이 돌고 군량미도 떨어졌으며, 수군도 풍랑을 만나 본토로 퇴각하였다.

 

612년 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동으로 출병하였다. 수 양제는 내호아를 수군대장으로 임명하여 평양성으로 곧장 향하게 하고, 육군은 요동성으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요동성 군사들과 백성들의 끈임없는 저항으로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수 양제는 우중문우문술을 각각 우장군과 좌장군으로 임명하여 30만의 별동대를 평양으로 직접 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살수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살수대첩). 결국 수는 이 전쟁의 충격으로 멸망하였으며, 고구려도 국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치며 수차에 걸친 침공을 매번 승리로 장식하던 고구려는 용전분투하여 세계사에 길이 남을 전승을 거두면서 동북아의 패자로 등극하게 된다. 계속된 전쟁과 폭정으로 힘을 다한 수나라가 결국 반란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는 수나라를 뒤이은 (唐)나라와도 대치하였다. 고구려는 당의 침공에 대비하여 천리장성을 쌓았는데, 연개소문(淵蓋蘇文)은 이 공사를 감독하면서 세력을 키웠다. 이에 위협을 느낀 중앙 귀족들이 연개소문을 제거하려 하자 연개소문은 642년 정변을 일으켜 영류왕(榮留王)을 비롯한 귀족들을 모두 살해하고, 보장왕(寶臧王)을 왕으로 세운 뒤 스스로 대막리지(大莫離支)가 되어 정권을 쥐었다. 연개소문은 대외 강경책을 펼쳐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당나라는 이연에 세워졌고 그의 아들 이세민이 아버지를 감금하고 형제를 죽이고 황제로 등극한 당태종이 영토를 확장하며 자신의 과오를 씻을 요량으로 '정관의 치'를 펼쳤으나 과욕을 참지 못하고 수나라의 원수를 갚고 신라를 괴롭히는 고구려를 응징한다며 645년 당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양만춘 장군의 활약으로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다.

 

안시성 성주 양만춘의 불굴의 투지와 지혜로운 방어작전으로 당군이 만든 토산을 무너뜨리고 당태종의 한 쪽 눈을 잃게 만드는 등 고구려군의 불굴의 항쟁으로 인해 당태종은 대패를 당하고 겨우 목숨만을 부지한체 요택으로 철수하여 재기를 꿈꾸었으나 결국 그 한을 풀지 못하고 고구려 원정 후 4년 만에 눈을 감았다.

 

이후에도 당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해 왔으나 그 때마다 연개소문이 격퇴하였다. 하지만 동맹국인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하자 고구려는 국제적인 고립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그 이듬해인 661년(보장왕 20년)에 평양성을 공격한 나·당 연합군을 고구려 군민이 막아내었다.

 

당 태종 이세민의 아들 고종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며 무황후의 가랑이 사이에서 고구려 정벌을 외치니 고종의 강압에 못이겨 당군이 다시 고구려를 다시 침공하였으나 침공시마다 고구려 연개소문의 지혜로운 전략.전술에 말려 승리하지 못하고 매번 패전만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당은 신라와 힘을 합쳐 백제를 멸망시키고 나서 고구려 정벌에 절치부심하고 있던 중 666년 고구려의 연개소문(淵蓋蘇文)이 죽자 그의 아들 연남생(淵男生)·연남건(淵男健)·연남산(淵男産) 형제는 막리지(莫離支) 자리를 둘러싸고 서로 내분이 일어났다. 그 결과 남생은 국내성으로 쫓겨난 뒤 당 고종에게 항복하였으며,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였다.

 

장남 남생이 아버지 연개소문의 막리지 대를 이었으나 변경 전선을 순시하던 중 두 동생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남생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단신으로 당으로 도망가니 당나라는 환호하면서 그를 맞아들였다. 아! 이게 무슨 변고란 말인가!  동북아를 호령하던 만주와 중원의 패자 고구려가 이제 드디어 멸망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러나 그 후 고구려의 국내 사정은 변모를 거듭하였다. 당이 융성 일로를 걷고 있었던 것과는 반대로 고구려의 국력은 쇠퇴해 가고 있었다. 60여 년에 걸친 수·당과의 전쟁으로 백성의 생활은 파탄에 직면했고, 국가 재정은 탕진되었다. 그 위에 동맹국인 백제의 멸망과 고구려 지배층의 내분은 더욱 그 국력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당은 남생을 고구려 토벌 대장으로 임명하여 그를 앞세우고 다시 고구려를 침공하니 이것은 후일 후삼국시대에 후백제 견훤이 아들 신검의 반란으로 김제 금산사에 감금되어 있다가 탈출하여 고려로 귀순하여 왕건의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자신이 창업했던 후백제 토벌에 앞장서서 결국 황산벌에서 후백제 신검의 항복을 받아낸 견훤이라는 불세출의 한 영웅의 분노는 고려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바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남생의 당군은 신성을 비롯하여 변경지역 가는 곳마다 고구려의 성주들이 스스로 성문을 열고 항복하는 웃지못할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아마 남생이 임명했던 장수들이라 스스로 항복하였으리라 생각된다. 그래서 이미 고구려의 운명은 망국의 길로 가고 있었던바, 고구려군이 파죽지세로 무너지면서 하평양성까지 피란갔던 보장왕이 결국 나당연합군에 항복하매 900년 이상을 지속해오던 동북방의 강대국 고구려는 668년 이렇게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 이후 검모잠(劍牟岑), 안승(安勝) 등의 고구려 부흥 운동이 지속되었으며, 안시성과 요동성 및 일부 요동의 성들은 고구려 멸망 이후인 671년까지 당나라에 항전하였다. 또한 보장왕도 말갈과 함께 복국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결국 698년 옛 고구려의 장수 출신인 대조영(大祚榮)이 만주 동부의 동모산(東牟山) 일대에서 발해(渤海)를 건국하면서 고구려 부흥 운동은 일단락되고, 고구려는 발해에 계승되었다.

 

한편 10세기에 들어서 후고구려(後高句麗)와 고려(高麗)가 각각 고구려의 계승국 임을 자처했는데, 이는 고구려의 영향력이 이 때에도 남아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구려는 한국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나라였다.

 

광개토태왕릉비가 고구려 장수왕이 세운 이래 만주 벌판에 우뚝 솟아 수천 년을 찬바람 눈.비 맞으며 묵묵히 서 있었으나, 통일신라 이후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도, 그리고 1870년대 일본인에 의해 발견되기 전까지 그 어느 조선인도 그 비석을 발견하지 못하였으니 참으로 한탄스런 일이었다. 그 비석은 금나라 황제가 세운 것으로 알려져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다는 것이다. 신라통일 이래 고구려에 대한 역사 연구와 역사서는 전래되는 것이 없음이 안타까운 일이며, 조선의 수많은 문헌과 보물이 도굴, 약탈해 간 중국, 유럽, 미국, 일본, 러시아의 어느 박물관이나 사료 보관소, 약탈자 후손의 개인 사저에 잠들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은 역사를 기술할 때 남의 나라 역사학자가 쓴 왜곡된 역사서나 참조하는 것에 불과하였으며, 특히 격변기에 고려가 살아 남기 위해서 쓴 역사서라지만 고려 시대 김부식과 같은 사대주의에 빠진 문신이 쓴 삼국사기가 유일하게 전해오고 있는 실정이며, 일제시대 식민역사학자 이병도를 포함하여 그의 제자들이 식민사관을 국정교과서에 삽입하여 오늘에 이르도록하여 한국 역사로 이해하고 있는 실정인바, 이는 온 국민이 자주성을 상실하고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무관심 할 뿐만 아니라 조상의 위대한 업적과 뿌리를 상실하게 만든 원흉이기도 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학자는 이병도의 제자와 후학들로 역사학계를 주름잡고 있는 현실이라, 뜻있는 일부 역사학도를 제외하고는 어느 역사학자도 왜곡된 우리나라 역사를 바로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 중국의 동북공정이 세간의 화두로 떠오르자 몇 몇 역사학자들이 고구려와 대륙백제에 대한 흥미위주의 상업적인 책자들을 출간하고 있으며, 텔레비젼에 역사 드라마가 재미위주의 픽션으로 꾸며져 시청률이 높아지면 뒤따라 관련 역사이야기를 다룬 책을 내놓는 등 뿌리와 줄기도 없는 단편적인 상업적인 저술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래서 역사를 전공으로하는 역사학자들은 근거와 자료가 부족하고 현지를 방문하여 답사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남겨진 왜곡된 역사서에 의존하며 안주하고 있는 실정이다. 오죽하면 70년대 중반에 어느 육사 출신 육군 포병 중위가 전쟁사를 전공하였는데, 임관 후 전방 지역 GP에서 관측장교로 근무시 비무장 지대내에서 삼국시대의 전적지를 연구하다가 비무장 지대내에서 신라 진흥왕 전적비를 추가로 발견하여 역사학계를 놀라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고구려 역사의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광개토태왕릉비는 1870년대 일본군 참모본부 소속 포병 중위이며 첩보요원이었던 '사오쿠' 중위에 의해서 발견되었다. 일본군은 이 비석을 일본으로 밀반출을 시도하였으나 집안현 지사 '오광국'이 거부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만약 이때 일본으로 반출되었다면 비문은 일제 침략을 합리화하는 내용으로 변조되었을 것이 분명하였다. 발견후 중국인들에 의해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최초 원본의 가격을 올리기 위해 비석의 많은 부분을 훼손시켜 지금 그 정확한 뜻을 해석하는데 국가별로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해석하는 등 가장 오래된 역사기록이 그 빛을 발휘하지도 못하고 있다.

 

중국은 위와 같은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며 그런 역사와 관련된 사적을 동북공정에 유리한 사적만 보수 보강하여 관리하고 있으며 기타 불리한 사적은 지우고 없애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들이 식민사관에 빠져 있는 동안 중국은 우리 고구려 역사를 탈취하고 그들의 지방정권으로 폄하하여 한반도를 식민화하는데 그 기초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다. 우리들이 우리 역사를 잊어버리고 방황하는 사이 우리 조상들의 역사는 사라질 운명에 처하였으며 국사 교육이 선택으로 바뀐 오늘날의 우리들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유태인들은 그들 조상의 역사인 '모세 오경'이 비록 모방되고 날조되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위대한 조상들의 역사로 간주하고 자라나는 후세들에게 매일 학업과는 별도로 유태인 집회당에 모여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며 그들 민족의 전통과 관습을 이어오고 있고 그것을 통해 그들은 2000년 동안 나라없이 세계 각지를 떠돌아 다니면서 극심한 박해와 차별 속에서도 그들 조상의 위대한 역사를 잊지 않았기에 오늘날 다시 그들의 고토 팔레스타인 땅에 이스라엘 이라는 나라까지 세우지 않았는가! 자신들 조상들의 역사를 잊은 자는 결국 이 지구상에 존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은 망각하고 있다는 점과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정신을 잊어버린 민족은 결코 위대한 역사를 세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데, 중국의 동북공정은 무슨 의도일까? 그들이 반드시 목적하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무너지고 파괴된 고구려의 성곽과 봉분을 제대로 된 고증도 없이 보수를 하고 덧칠을 하는 등 자기들 속국 역사로 만들기 위해 유네스코에 등제하려고 까지 하고 있다. 이 문제는 북한과 같이 공동으로 강력대처해야 할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지난 번 남북정상회담의 주요 안건으로 제안하고자 하는 역사학자나 정치가가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탁발씨가 건국한 선비족의 나라 위나라, 글안족이 세운 금나라,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 여진족이 세운 요.청나라가 주변 소수민족이지만 중원을 장기간 점령하여 한족을 통치하였으나, 그들 소수민족은 몽고를 제외하고는 국가다운 국가를 지금까지 유지해온 민족은 없다. 현재의 그들은 만주와 시베리아 등지에 뿔뿔이 흩어져 소수 민족으로 한족의 지방 자치구로 차별받으며 가난하게 살아가고 있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들이 세운 나라와 역사는 사라졌다.

 

그러나 중국의 수.당나라의 침공에 대항하여 수백 만 군대를 저지한 고구려는 그 후 당의 집요한 공격과 신라의 외부 세력을 이용한 통일 전쟁을 통하여 결국 멸망하였으나, 고구려 후예인 대조영에 의해서 대발해의 재건과 부흥으로 수백 년 간 명맥을 유지하였다. 비록 신라가 삼국통일의 위업은 달성하였지만 지금은 재평가 되고 있는 것은 만주 강역의 고구려 고토를 상실하고 오로지 반도내에서 안주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중국의 수와 당은 고구려 정벌로 인하여 수나라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고, 당태종도 중국 역사에서는 '정관의 치'라 칭송하며 중국 역사에서 가장 현명한 성군으로 평가하고 있으나 치적 말년에 고구려를 3차에 걸쳐 침공했던 것이 당나라 국운이 쇠약해지는 가장 큰 요인으로 평가하고 있다. 비록 고구려와 벽제가 나.당연합군에 멸망당하였으나 그들은 중국의 지방정권이 아닌 당당한 개별국가로 자리메김 하였던 것이다. 수나라 인구수는 당시 2000만 명 정도였는데, 전투 참가 병력이 100만 명이라면 그 지원병력은 전투병력의 2배 정도로 보았을 때, 거의 300만 명에 가까운 병력으로 고구려를 침공하였던 것이며, 결국 약 30만 명의 수나라 별동대인 육군은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에서 대부분 전멸되었고, 수군 30만 명도 대동강 입구 전투에서 상륙하다가 고구려 군에게 전멸되었던 것이다. 그후 중국의 당나라와 원나라, 청나라는 고구려, 고려, 조선 정벌시 엄청난 전비와 병력으로 나라가 망했던 수나라를 상기하고, 한반도 지배에 연연하지 못하고 군신관계, 형제관계, 조공관계, 상국대우만 요구하고 물러났던 것이다. 한반도는 그들 입장에서는 나라를 망하게 하는 사지이며 망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