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면산의 겨울 5 :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우면산의 겨울 5 ;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뉴코아 백화점 크리스마스 전광판
11월도 화살처럼 지나가고 어느듯 12월이 되었고 영하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영하로 기온이 떨어지면 새벽길에 자전거를 탈 때 체감온도는 대략 3~4도 정도 더 낮다. 그래서 복장을 단단히 하고 타지만 손끝과 발끝은 시리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발열판을 구입하고 방한장갑도 구입하였다. 영하 10도 이하로 떨어지면 자전거를 타기가 힘들다.
날씨기 추어지니 새벽 운동을 하는 사람이 줄었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도 보기에 힘들다. 청소차 환경미화원 아저씨들만 변함없이 매일 쓰레기를 열심히 수거하고 있다. 건물 빌딩 관리회사 청소 아줌마들도 열심히 새벽 출근을 하고 있다. 폐지 줍는 노인들은 줄었고 길거리 노숙자들도 잘 보이지 않는다.
시내 곳곳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세워지고 현란한 불빛을 반짝이고 있다. 주로 대형 가게나 백화점 같은 곳에 세워지고 있는데 경기가 어려운 시절이라 예년같지 않은 듯하다. 지난주에는 고속터미널 근방 뉴코아 백화점에도 사진에서 처럼 거대한 크리스마스 전광판이 세워졌다. 년말 크리시마스 대목을 노리고 업주는 자신의 종교에 관계없이 세워지는 전광판은 기독교를 전파하는 수단으로 정착된지 오래다.
예수, 마호메트가 탄생된 이래 인류는 더 많은 전쟁과 살륙을 겪고 있는 것은 그들이 바이블에서 주장하는 사랑이 넘치는 평화로운 세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은 천국이라는 무형상품을 이용하여 다단계 방식으로 종교를 확산하여 왔고 우매한 백성을 속이면서 각종 헌금과 기부금으로 종교적 세계 지배를 꿈꾸는 탐욕의 집단에 불과하였다는 점이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에서는 유혈사태가 계속되고 있는 것도 결국은 종교적인 갈등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며 2000년이 넘게 아직도 진행중이다.
백성들은 우매하고 가난하다. 그들이 꿈꾸는 천국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로 인해 지구는 더 많은 전쟁과 고통을 받아야 했고 인류의 역사는 그들의 투쟁의 역사였다. 교황이 세계를 지배할 때 중세는 암흑시대가 전개되었고 모든 논리는 종교적인 논리를 벗어날 수도 없었고 모든 인류의 문화는 종교적인 표현에 열중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바라던 천국은 말로만 천국이요 죽어서나 갈 수 있다는 허황된 감언이설로 민중을 선동하여 그들의 치부에 이용하여 왔고 그들이 속세에서 탐욕에 빠지면서 반동에 반동이 나타나고 이단에 이단이 나타나 어느것이 정통인지도 모를지경이 되고 말았고 수만가지 종파가 태어났다. 그들의 바이블은 추종자들에 의해 수천년을 부풀리고 첨가되고 가감되어 왔고 주변의 각종 신화, 풍습, 전설을 그들 것으로 변질시켜 만든 바이블로 거짖과 허황된 이론으로 민중을 현혹시켜 왔다.
마호메트의 이슬람교는 예수를 신격화한 기독교를 부정하고 태어난 뿌리인 유태교에 대해서는 이단의 이단이다. 그들은 지금까지도 종교적 지배를 하고 있으며 민중들은 종교적인 율법 속에 억눌려 살면서 가난한 삶을 이어오고 있다. 사회 규범이 이슬람 종교적 이론을 벗어날 수도 없으며 성전이라는 구호아래 그들의 적, 즉 타종교에 대해서는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상실한 폭력적인 종교가 되었다. 지금도 중동, 파키스탄, 인도네시아 등지에서는 차량 폭탄 테러가 곳곳에 발생하고 있으며 그들은 차량 폭탄 자살자를 양산하면서 죽어서 천국을 갈 수 있다면서 현혹시키고 있다. 종교가 권력화.정치화 되는 순간부터 그 종교는 본래의 의의를 상실하고 탐욕의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지구상은 각종 사상과 종교적인 집단 이기주의와 갈등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다. 그기에다 강대국들의 영토 확장 탐욕은 끝없이 전개되고 무역분쟁과 자원전쟁도 가세되어 지구는 조용할 날이 없다. 북극권의 얼음이 녹는 속도가 증가하고 이상기후로 각종 재난이 곳곳에 속출하고 있다. 자연재해뿐 아니라 인간에 의한 재해도 줄어들줄 모른다. 약자를 강탈하는 권력과 부를 가진자들의 변함없는 탐욕은 인류의 역사에서 사라질 날이 없는 듯하다. 마야 달력에서 예언하였듯이 오는 12월 21일 지구 멸망을 우려하는 많은 사람들이 조용히 숨 죽이고 그 날을 기다리고 있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거울, 썩은 검찰
최근 우리 나라 검찰이 자만과 오만 속에 오랜 세월 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탐하면서 부귀영화를 누려오다가 최근 각종 뇌물 사건, 항명 사건, 성폭행 등의 각종 사건으로 인해 스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선 듯하다.
우리 나라 검찰은 다른 나라에 비해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누구도 그들의 부패한 일상을 탓할 수도 없었고 관행적으로 권력과 부를 누려왔다. 이제는 검찰이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국민들의 공분을 살 수밖에 없는 상황가지 왔는 듯하다.
결국 검찰총수가 허망하게 사퇴를 했다. 그는 자리에 연연하며 버티다 부하들로부터 용퇴 압력을 받고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물러났다. 지난 11월 한 달 동안 4명의 검사가 대한민국 검찰을 난파선으로 만들었다. 온갖 방법으로 돈을 거둬들인 ‘돈 검사’, 검사실에서 여성피의자와 성행위를 한 ‘성 검사’, 개혁을 하는 시늉만 하면 된다는 ‘꼼수 검사’에 이어 공개 감찰을 거부한 ‘정치 검사’가 그들이다. 이들은 썩을 대로 썩은 검찰의 치부를 국민에게 ‘버라이어티 쇼’로 보여준 꼴이다.
검찰의 이전투구는 그 결정판이다. 검찰총장의 지시를 받은 대검 감찰본부가 구속된 김광준 검사에게 언론대응방안을 문자로 알려준 최재경 중앙수사부장을 어제 품위손상 혐의로 감찰하려고 하자 최 부장이 항명한 것이다. 총장이 부하를 제물 삼아 자리를 유지하면서 중수부 해체의 명분을 얻으려 했거나, 중수부장이 몸담은 조직의 해체를 막고자 직속상관에게 저항했다는 관측이 사실이라면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낯 뜨거운 권력게임일 뿐이다. 이 와중에 보인 대검차장과 대검 부장들의 행보도 수상쩍다. 이들은 총장 모르게 밤 늦게까지 회의를 열어 “더는 총장으로서의 직책을 수행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내린 뒤 용퇴 건의 사실을 직속 공보라인인 대검 대변인을 배제하고 서울지검 특수1부장을 통해 언론에 공개토록 했다. 현직 총장의 지휘체제를 참모들이 정면거부한 것은 물론 이번 검란(檢亂)이 검찰조직의 핵심인 중수부를 비호할 목적으로 내부에서 기획됐다는 인상마저 준다.
검찰청
권력의 시녀, 검찰청사
기소독점 등 세계에서 유례 없는 형사사법절차의 권한을 행사하면서 권력의 단맛에 빠져 있는 검찰생리를 감안할 때 뿌리째 흔들린 검찰조직이 한 총장의 사퇴로 수습되기는 힘들 것이다. 자정과 자체 개혁에 건 국민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검찰의 총체적 난맥상은 외부에 의한 검찰 개혁이 불가피함을 보여준다. 이미 대선 공약으로 제시된 바 있지만, 중수부 폐지와 함께 기소권과 수사권을 보유한 공직자비리수사처의 신설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한 총장이 사퇴 전 검찰개혁안을 발표한다고 하지만, 어느 국민이 여기에 기대를 걸겠는가.
만추
검찰의 개혁은 검찰에 맡겨서는 안된다고 본다. 특검무용론이 나온 것은 아무리 특검을 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검찰 개혁을 위해서 대대적인 수술을 단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재야법조인,학계, 시민단체 등이 참여한 검찰개혁이 이루어져야 하고 검찰의 권한도 축소하고 견제 기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아픙로 사시가 어뵤어지게 될 것이지만 법조인의 양성제도에도 충분한 검토를 거쳐 개선해야 할 것이다. 정치권에 휘둘리지 않는 검찰,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를 엄단하는 시스템, 부정과 비리에 연루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정한 법을 적용할 수 있는 검찰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 이래 그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였다고 생각된다. 인간은 누구나 권력을 가지는 순간부터 부패하기 시작하기 때문에 그러한 오류를 방지할 수 있는 제도적 시스템이 조성되어야 할 것이다. 명예, 조국, 헌신의 수년간 집중적인 교육을 받고 배출되는 각종 사관학교 출신들이 소위로 임관하여 군생활을 하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반 출신 장교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아부하고 재물에 취약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생각된다. 인간이 타락하는 것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강직과 야합 사이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에서 가르치는 것은 불의에 야합하지 말고 정의를 위해서 바른 길로 가야 하고 불의에 맞서는 강직한 성품을 가지라고 한다. 불의를 참지 못하고 정의를 위해서 분연히 일어나 불의에 맞서도록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자신의 주장을 포기하고 상관에게 아부하고 뇌물을 갖다바치며 절대복종하라고 가르치지는 않는다.
그래서 부모나 학교에서 가르친대로 불의에 참지 못하고 청렴하고 고지식한 사람은 공직에 오래 견디지 못하는 게 우리 사회다. 바른말하고 강직한 성격의 소유자는 상관에게 맞아서 잇빨이 빠지거나 근무 평정을 나쁘게 받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대부분 더러워서 반항하다가 처벌을 받거나 스스로 중도에 공직을 떠난다. 그런 사람 중 대부분은 40중반 쯤에 사회로 나와 사기를 당하거나 자영업을 개업하지만 대부분 몇 년 지나지 않아 퇴직금이나 창업 자금을 날리고 문을 닫는다. 연금이라도 받으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가난을 면키 어렵다. 돈을 벌지 못하는 가장은 마누라나 자식들 한테 멸시받고 천시받기 쉽다. 요즘 드라마 '내딸 서영이'가 인기를 얻고 있는 것도 이러한 아버지들의 힘든 모습을 잘 표현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일부 사람은 상관에게 아첨하면서 성실한 모습을 보인다. 그런 사람은 상관이 생일, 명절, 자녀 입학/졸업/결혼, 조문 등 때마다 부부가 찿아가서 선물/부조금/축하금 등 각종 뇌물을 건네고, 또 마누라는 별도로 그 집 사모님을 찿아가서 갖은 이양을 떨며 궂은 일 마다않고 집안일을 도우고 헌신해야 이불밑 송사로 남편에게 충성하는 것으로 만드는 게 사람이다. 뇌물이란 처음에 좀 어색하지만 반복되면 될수록 점점 더 큰 것을 희망하고 별 볼일 없는 뇌물은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사람이란 재물을 갖게되면 권력을 탐하고 권력을 갖게 되면 재물을 탐하는 것이 사람이다.
정치인, 군인, 경찰, 조폭, 각종 단체 등 집단 조직의 우두머리는 쉽게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수천 명이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을 부르짖으며 추앙하는 장소에서 누가 감동하지 않을 것인가? 스스로 자기 최면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나라의 최고 권력의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가 연일 터져나오고 권력의 시녀들인 검찰은 썩을대로 썩어 내분을 일으키더니 결국은 총수가 사퇴하였다. 또 재벌들의 탐욕과 공무원의 부정도 끊이지 않고 있어 국민들은 믿고 의지할 데가 없어 불안하기 그지없다. 무질서와 혼돈 못지않게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사회 역동성이 사라진 정체된 사회다. 고인물이 썩듯이 사회 각분야는 썩지 않은 곳이 없다. 가진자와 갖지 못한자 사이에 권력과 재물의 순환이 정체된 사회는 내부적으로 깊은 말기암적인 증세를 보이는 것이며 결국은 망국을 초래한 절대 왕조 시대 조선의 신분제 시대와 유사한 구조를 가지게 된다.
권력과 재물을 가진자들이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사회는 썩기 마련이다. 사회가 발전도 퇴보도 없이 제자리에 머물러야만 하는 정체는 우리의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끝내 의욕을 상실하게 할 뿐만 아니라 무력감에 빠지게 한다.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중소기업과 서민들은 물론 정권말의 무기력한 정부와 지도층의 부정부패, 대선후보들의 혼전은 국민정서를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로 내몰고 있는 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모두가 새로운 변화를 바라고 있지만 그 변화가 질서와 발전을 기약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기에 국민은 더욱 답답한 것이다. 변화를 희망하여 진보적 인사들이 제도권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터주자 이들의 행태는 기성정치인을 뺨칠 정도의 술수와 노골적인 탐욕을 드러내어 우리를 실망시켰다. 우리는 기득권을 지키고자 기존의 질서와 사고방식을 고집하는 보수적 행태도 배격해야 하지만 진보의 탈을 쓰고 국민의 마음만 빼앗으려는 일부 집단의 편향적 행태도 배척해야 할 것이다.
사람은 물론 모든 사물은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특히 사람은 제자리에서 본분에 충실할 때 더욱 빛이 난다. 국민의 눈에는 제자리에서도 본분을 제대로 못하던 인물이 어느 날 갑자기 정치 지도자가 되겠다고 나서거나 권력 주변에라도 끼어보겠다고 동분서주하는 아름답지 못한 그림이 자주 눈에 띄고 있다. 속된 말로 정치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고 또 아무나 해서는 아니 되는 영역이 분명함에도 이 나라에서는 아무나 다 정치 지도자가 되어보겠다고 덤비는 아이러니한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극언하면 그 어떤 소명의식도 없이 오로지 권력과 부라는 양날의 검을 좇아 허둥대다가 대부분 제 칼에 찔리는 허망한 말로를 맞는 모습을 보이는 이들이야말로 공해다.
우리 모두 좀더 차분하게 자신의 위치에서 본분에 충실해야 할 것이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와 판단을 하면서 이 혼돈의 시대를 극복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이 혼돈이 제발 이 해를 넘기기 전에 제대로 정돈되어 새해에는 질서가 살아있는 가운데 모두가 제자리에서 희망과 의욕을 가지고 역동적으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야합과 반역의 시절
바야흐로 야합과 반역이 난무하는 정치의 계절이다. 정치판의 모리배들이 교언과 허언을 일삼으며 치마끈을 풀어헤치고 날뛴다. ‘지구 한 바퀴를 도는 동안 당적을 13번 바꾸며 마침내 본집에 돌아왔다’는 인물에다 야합을 일삼는 모리배의 전형은 현란한 처세술과 무지한 독설에서 볼 수 있다. 이명박 대통령과 박근혜 후보 사이에서 권력의 추를 따라 나댔던 것은 그들의 생존법이니 웃어넘길 수도 있지만 ‘가계의 친일행적’을 광적인 ‘레드 콤플렉스’로 상쇄시키려는 책동은 비열하기 짝이 없다. 사실을 날조하여 적의를 확산시켜 상식과 비판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사회를 광기의 도가니에 빠뜨려 구성원들이 흑백논리에 갇히게 한다. 내부 분란을 야기하여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는 게 그들의 술수다.
친일파의 후손들은 친일부역 오명의 굴레에서 자신들의 선친을 구하는 수법을 안다. 대중매체를 장악하여, 쉴 새 없이 ‘종북주의, 좌파 빨갱이, 북방한계선(NLL)’을 들먹이며 막무가내로 떠들어야 한다. 합리적 비판이나 논쟁이 시류를 주도하면 그들이 설 자리가 없어지니까.
폭로를 가장한 무책임한 언동으로 정치혐오증을 유발하는 정치 모리배들을 청소하는 것이 정치판의 쇄신이다. 이번 대선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정치 쇄신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권력을 좇아 단맛만을 빨며 야합으로 놀아났던 값싼 입들’이 더 이상 국민을 이간질할 수 없도록 도태시켜야 한다.
초록과 단풍의 조화
바위, 강아지풀, 가을 하늘
여론조사의 허실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대선후보 여론조사가 벌어지며, 그것을 용납하는 곳이 한국이다. 정부의 어떤 정책도 그렇지 않은데 대통령 후보는 여론조사로 결정된 역사가 우리에겐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정몽준 의원은 10년 전 대통령 후보를 여론조사로 결정했다. 여론조사는 민심의 거울이라고 한다. 민주주의 정부와 정치에 필수불가결한 존재이며 건강한 민주주의의 정수(精髓)라고 불리기까지 한다. 여론조사의 목적은 정확한 유추를 하기 위해서다. 정부나 정치인들은 국민이 어떤 생각을 하며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싶어 하기에 여론조사가 필요하다. 여론조사는 결정 수단도, 투표의 대체물도 아니다. 결정을 위한 참고자료일 뿐이다.
여론조사가 시작된 지 200년이 다 되도록 결정을 위한 참고자료에 머물러 있는 것은 끊임없이 보완되어야만 하는 미완성 기술이기 때문이다. 여론조사의 고질적 결점은 조사 표본의 오류다. 1936년 미국의 잡지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대선 직전 1000만 명에게 카드를 발송해 230만 명의 응답을 받은 결과 공화당 후보 앨프 랜던이 현직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을 57% 대 43%로 이길 것이라고 발표했다. 투표 결과는 루스벨트가 61%를 득표해 압승이었다. 이전 네 번의 선거 결과를 정확하게 맞추었던 ‘다이제스트’로서는 일대 망신이었다. 이 잡지는 대체로 1000명 안팎을 조사하는 요즘 여론조사와는 달리 엄청난 수의 유권자를 조사하고도 실패했다. 그만큼 국민 전체를 고루 대표하는 조사 표본을 만들기가 어려운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술 보완이 이뤄졌다고는 하나 정확한 표본을 만드는 것은 여론조사의 영원한 숙제다. 또 여론조사는 질문 내용이나 질문자 유도에 따라 대답 내용이 달라질 수 있는 태생적 편견을 안고 있다. 질문에 아예 대답하지 않는 무응답이 많은 것도 문제다.
디지털 시대는 여론조사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휴대전화는 유선전화처럼 전화번호부가 없기 때문에 조사 대상자 추출이 불가능했다. 최근 RDD(Random Digit Dialing) 기법으로 그것이 가능해졌다고는 하나 이전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든다. 휴대전화 이용자들은 대체로 잘 모르는 번호는 받지 않아 더 많은 전화를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직 외롭거나 지겨운 사람, 가난하거나 기계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만 조사에 응하는 것이 디지털 시대 여론조사의 참 모습이라는 것.
다른 나라에서 여론조사가 감히 후보나 대통령을 결정하는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200년 역사 동안 여론조사는 한국을 포함한 세계 각국에서 성공 못지않게 수많은 예측 실패를 경험했다. 4월 총선에서 77억 원을 들인 한국 방송 3사의 공동출구조사가 틀렸다. 미국도 이번 대선에서 실버 이외의 많은 전문가의 예측이 맞지 않았다. 여론조사를 통해 마치 로또 숫자를 맞추듯 예측의 스릴은 느낄지 몰라도 그것은 여전히 ‘뛰어난 과학이기보다 정밀성이 떨어지는 위험한 기술’이다.
경부선 고속터미널
동북아 안보 혼돈, 대선 후보
동북아 지정학은 매우 유동적이다. 정치 리더십 교체가 이뤄졌거나 진행 중이어서 본격적 질서재편을 예고하고 있다. 중국의 급부상에 따른 새로운 국제질서, 미국 오바마 2기의 행정부와 중국 시진핑 5기 지도부의 한반도 정책, 북한 김정은 3대 세습 체제는 대한민국 차기 대통령이 직면할 주요 외교·안보 과제이다. 이들 도전에 관한 성찰이 부족한 지도자는 대한민국호를 이끌 선장이 될 자격이 없다. 대선 후보들은 국가 존망과 직결되는 안보 현안에 대해 명확한 관점을 공개하고, 어떻게 나라를 지키고 국가 입지를 넓혀갈지 구체적 복안을 내놓아야 한다. 안보 리더십이 부실하다면 차기 대통령 취임은 꿈도 꿔서는 안 된다.
위스키 최대 소비국
우리나라가 작년 한 해 17년산 이상 고급 위스키를 69만8000상자 마셔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위스키는 상표별로 병의 크기가 달라 9L를 한 상자로 계산한다. 2001년부터 11년째 세계 1위다. 인구 5000만명인 나라가 3억1000만명의 미국(47만8000상자), 13억4000만명의 중국(23만4000상자), 1억3000만명의 일본(14만 상자)보다도 고급 위스키를 더 많이 마셨다.
컨설팅 회사인 맥킨지에 따르면 한국의 명품 시장은 2006년 이후 매년 12%씩 고속 성장해 연간 45억달러(약 4조8000억원) 규모에 이른다. 가계 소득에서 명품 소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5%로 일본의 4%보다 높다. 세계 유명 의류·가방·장신구·보석 브랜드들이 신제품을 개발하면 제일 먼저 한국 시장부터 공략하는 게 이제 판매의 정석이 됐다. 한 대에 169만원 하는 노르웨이산(産) 최고급 유모차도 전 세계 판매 대수의 13%가 한국에서 팔렸다.
일본이 20년 장기 불황에 빠지기 직전 모습과 요즘 한국은 닮은꼴이다. 1985년까지만 해도 일본 내 수입 외제차 대수는 모두 51만대에 불과했다. 그게 1990년 한해에만 22만대나 팔려나갔다. 루이뷔통은 전체 매상의 50%를 일본에서 올렸고 세계 다이아몬드의 20%가 일본으로 팔려나갔다. 일본인 수집가들은 뉴욕 크리스티와 소더비 경매장에서 고흐와 르누아르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사들이며 경매 최고가 기록을 70%나 올려놓았다. 1960년대 350개였던 골프장이 1990년대 2000개로 늘었고 골프장 회원권은 최고 5억엔까지 치솟았다. 골프장 클럽하우스도 서양 대부호의 저택처럼 으리으리하게 지었다. 최상류층에서 시작한 호화·사치 풍조가 한때 일본의 미덕으로 일컬어지던 중산층 국민의 검박(儉朴)한 생활 태도까지 흔들어 놓았다.
그러고 얼마 후 일본 경제 사상 최장기 불황이 닥쳐왔다. 부동산 값이 가라앉고 과소비(過消費) 버블이 함께 꺼졌다. 골프장은 1000개가 도산했다. 도산한 골프장을 인수할 사람이 없어 지자체에 공짜로 넘겨주는 일까지 벌어졌다. 호화·사치·안일(安逸)의 풍조 속에서 자랐던 젊은이는 도전 정신을 잃어버렸다. 지난 10년 사이 해외 유학을 떠난 대학생은 52% 줄었고, 신입사원 2명 중 1명은 해외 근무를 거부한다고 한다. "급속히 고령화되는 한국이 경제성장 엔진이 꺼진 일본의 길을 가고 있다"고 지적한 미국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의 경고가 예사말처럼 들리지 않는다.
고속터미널 호남선
일본의 실패, 따라가는 한국
일본 경제가 다시 추락하고 있다. 일본의 3분기 경제성장률은 전기 대비 0.9%, 연율로는 3.5% 감소했다. 동일본 대지진으로 공공투자가 크게 증가했음에도 수출과 설비투자, 민간소비가 모두 쪼그라들었다. 일본은 '잃어버린 20년'에 이어 또다시 경기침체에 빠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대로 가면 일본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소비세율 인상도 물 건너갈 수 있다. 어제 중앙일보에 보도된 일본 현지 분위기는 흉흉하다. 국제경쟁에서 밀려난 소니·파나소닉·샤프·후지쓰 등이 국내 공장을 폐쇄·축소하면서 기업 조카마치(城下町·성 아랫마을)들이 황폐화되고 있다. 성장 엔진인 기업이 죽으면 주변 마을도 시들기 마련이다.
일본 경제의 실패 원인은 복합적이다. 부동산·주식의 거품 붕괴에 이어 엔화 강세의 쓰나미가 밀려왔다. 일본 정치권은 근본적 수술은 미룬 채 공공투자 확대와 금리 인하에 골몰해 재정만 악화시켰다. 여기에다 급격한 고령사회까지 겹치면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일본의 침몰은 우리의 반면교사(反面敎師)다. 우리 경제도 벌써 장기 저성장 국면에 접어드는 조짐이다. 잠재성장률이 꺾이면서 언제 일본처럼 제로 성장에 빠질지 모른다. 급속히 고령사회로 치닫는 것도 일본과 닮은꼴이다. 우리 정치권도 일본처럼 선거 때마다 반(反)기업 정서를 부추기며 복지 포퓰리즘에 매달리고 있다.
일본의 비극을 답습하지 않으려면 미리 대비해야 한다. 기업을 때리기보다 '기업하려는 마음'을 불어넣는 게 중요하다. 정규직 귀족노조들은 '일하려는 마음'을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성장잠재력이 확충되고 경제가 지속 가능한 궤도로 굴러갈 수 있다. 일본처럼 기존의 성공 신화에 사로잡혀 '갈라파고스 증후군'에 빠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끊임없는 도전으로 미래의 먹거리를 발굴해야 한다. 더 이상 수출 대기업 중심의 기존 구조로는 앞날을 보장할 수 없는 대(大)전환기다. 세계시장에 통하는 수많은 중견기업과 강소(强小)기업을 키워내야 내수가 확대되고 고용문제도 풀 수 있다. 이웃 일본의 실패에서 배울 시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삼성과 서울대
삼성과 서울대는 ‘최고’라는 점에서 닮았다. 삼성은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이며, 서울대는 학력 서열 1위이다. 삼성은 우리나라 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으며, 서울대는 국내 수많은 대학들을 선도하고 있다. 삼성은 대학생들이 입사하길 가장 원하는 곳이며, 서울대는 고교생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삼성의 경우 국민적 사랑에 보답하려는 듯 국가 사회적 책무에 비교적 충실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기업 브랜드 가치 세계 10위권인 초일류 삼성이 부의 세습과 문어발식 확장 등을 이유로 다른 대기업들과 함께 재벌개혁의 심판대에 올라있는 건 가슴 아픈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의 낮은 곳을 배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함께 가는 열린 채용 제도’를 도입한 삼성은 최근 3급(대졸) 신입사원 공채에서 4500명의 5%에 해당하는 220명의 저소득 가정 출신자를 선발했다. 전체 합격자의 36%(1600명)는 지방대 출신이다. 장애인 600명을 별도로 뽑기도 했다. 최고 인재만을 선발할 능력이 있음에도 해외유학 다녀온, 부잣집 자녀나 스펙 좋은 서울 명문대 졸업생만 골라서 뽑지 않는다는 사실은 신선하다. 임직원 3000여명이 어려운 환경의 초등학생 멘토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나 사회적기업을 5개나 운영하고 있는 것도 국민과 함께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라 평가하고 싶다.
서울대는 어떤가. 인터넷 홈페이지를 보면 오연천 총장이 인사말을 통해 “이제 국민에게 사랑받는 서울대학교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입시제도와 최근의 입학생 현황을 살펴보면 서울대가 과연 전체 국민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문이다. 서울대가 수시 지역균형선발전형과 정원 외로 뽑는 기회균형선발특별전형이란 입시제도를 갖고 있다는 점은 평가할 만하다. 가정 형편상 도서 벽지에 살더라도 고교 내신 성적이 우수한 학생과 사회적 약자들에게 최고 국립대학의 문을 열어놓은 것은 ‘나눔’의 표시로 이해된다. 문제는 그것뿐이란 사실이다.
2014학년도 입시안을 보면 입학사정관제로 선발하는 수시 일반전형 모집인원이 전체의 58%나 된다. 이 전형은 서류평가로만 뽑거나, 서류와 면접 및 구술고사를 거치도록 돼 있다. 지원자는 학교생활기록부와 자기소개서뿐만 아니라 학교(출신고교)소개 자료와 추천서를 함께 제출해야 한다. 입학사정관과 면접 교수가 학생의 잠재력을 중점적으로 본다지만 출신고교의 학력수준과 부모의 사회 경제적 지위 등을 살펴보겠다는 의도 아닌지 모르겠다. 거기다 이과계 면접 및 구술고사는 상당부분 대학에서 배우는 수준이어서 AP(대학과목선이수제)를 한 특목고생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지난해 서울대 입학생의 65.7%가 특목고와 서울 강남3구(강남·서초·송파) 출신이라는 통계(KDI 11월 5일 발표)는 이런 ‘가진 자 우대전형’의 결과물이 아닌가 싶다. 서울지역에서 서울대에 진학한 학생 중 특목고생 비율이 2002년 22.8%에서 지난해 40.5%로 증가했다는 사실은 서울대가 은밀하게 고교등급제를 실시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서울대가 2014학년도부터 정시모집 수능 반영 비율을 30%에서 60%로 높이고, 내신반영 비율을 40%에서 10%로 낮추기로 한 것은 그동안 명문 사립대에 빼앗겼던 일부 수능 최우수 학생들까지 싹쓸이하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서울대가 법인화됐다지만 엄연히 ‘국립대학 법인’이다. 엄청난 액수의 국민 세금이 들어가는 대학이 경제적으로 부유한 특목고생과 강남3구 출신 학생의 전유물이어서는 안 된다. 서울대 입시제도의 전면적 손질이 필요한 이유다.
70대의 위험한 순정
배우자 간병을 맡고 있는 70대 남자 어르신들의 인상을 한마디로 말하라 한다면 ‘순정남’이라고 하겠다. 엉뚱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 그랬다.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77세 P 씨였다. P 씨는 파킨슨병과 치매를 앓고 있고 의식마저 불분명한 아내(73)를 10년째 혼자 돌보고 있었다. 다행히 외부 정보에 밝고 주변의 도움도 잘 받아들이는 편이어서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가 시작되자마자 등급판정을 신청해 1등급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방문요양서비스(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1일 4시간)와 방문간호(1주일에 1회)를 받고 있었다.
이 시간 외에는 P 씨 혼자 아내를 돌보는데 수발이 얼마나 극진한지 방문간호사가 “환자가 이런 상태로 10년이나 버틸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기적 같다. 이 모든 게 할아버지의 지극 정성 때문”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더 대단한 것은 병든 아내를 돌보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고 아내 옆에서 쓰기 시작한 붓글씨로 각종 상을 휩쓸었고, 요즘엔 심사위원으로 활동할 정도라고 한다. 수지침과 뜸 기술도 익혔고, 책(비망록)도 2권이나 출판했다.
P 씨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내의 병세가 점점 악화되다 보니, 주변에서 요양시설 입소를 권유하는 목소리가 많아지고 있지만 P 씨는 “마지막까지 집에서 아내를 돌보고 싶다”라고 말한다. 아내가 집에 있어야 보고 싶을 때 마음대로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내가 그에게 “요양시설로 매일 찾아가시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자 정색을 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집하고는 다르지요. 안사람을 잠시라도 못 보면 못 견딜 것 같아요.”
어르신들의 집을 직접 방문하여 등급판정 조사를 하는 건강보험공단 직원이나 재가(在家)서비스를 담당하는 사회복지사들에 따르면 P 씨 같은 분이 많다고 한다. 그러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우자에 대한 70대 남자 어르신과 여자 어르신의 태도가 매우 대조적이라는 점도 지적한다.
남자 어르신 중에는 배우자가 누워 있는 침대 옆 바닥에 자리를 깔고 자면서 수발을 하는 등 정성을 다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자 어르신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여자들은 오히려 거동이 불편한 남편 앞에서 “내 몸도 힘들어 죽겠는데 저 인간 수발까지 해야 하느냐?”라고 넋두리를 퍼붓거나 노골적으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심지어 남편이 누워 있는 방에 들어오는 것조차 꺼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이쯤 되면, ‘순정을 다 바치는 남자 어르신’과 ‘마지못해 의리를 지키는 여자 어르신’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과는 사뭇 다른 남녀 관계의 반전이 떠오르지 않는가?
그러나 정말 심각한 문제는, 70대 남자들의 ‘순정’이라는 게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순정남의 두 얼굴이랄까?
요즘 세간에 충격을 준 뉴스를 장식한 70대 남자 어르신들을 보라. 치매에 걸린 아내를 살해한 사람은 78세의 남편이다. 얼마 전에는 72세 어르신이 뇌성마비를 앓고 있는 열두 살 난 외손자를 살해하고 자신도 목숨을 끊은 사건이 발생했다. 뇌성마비 아들을 두고 고생하는 딸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들은 살인이라는 강력범죄의 가해자이면서도 ‘오죽하면 그랬을까?’라는 동정심도 자아내는 게 사실이다. 끔찍한 행동의 이면에 ‘치매 아내를 끝까지 책임지겠다’라거나 ‘사랑하는 딸을 위해 외손자를 데리고 간다’라는 식의 ‘책임감’과 ‘사랑’의 논리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책임감은 과도할 뿐 아니라 시대에 맞지 않는 ‘가부장적’ 책임감이다. ‘파괴적’이고 ‘빗나간’ 사랑이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인권에 대한 인식 자체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모든 인간은 존재 그 자체로서 소중하고 고귀하다는 사실, 아프고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도 성장의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남편이나 부모(조부모)라는 이유만으로 한 사람의 생명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한마디로 자기만의 잘못된 논리 속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가 뇌성마비 외손자를 살해한 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만났던, 20대 중증 장애인 아들을 둔 한 어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장애인 부모가 모두 똑같이, 매일 힘들기만 할 거라는 생각도 일종의 편견이지요. 그 할아버지는 그런 엄청난 행동을 하기에 앞서서 반드시 딸의 생각을 물었어야 했습니다.”
자기만의 城에 갇힌 파괴적 사랑
우리나라 70대 어르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며 오늘날의 경제성장을 이끈 집요함과 고집, 성실성을 가진 세대라는 점에서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나 결핍의 시기를 겪어 오느라 노화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변화나 삶의 위기에 대해 성찰하는 ‘유연성’이나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묻고, 타인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청하는 ‘사회성’이 매우 부족한 세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제 아무리 대단한 순정이라 할지라도 자신만의 생각에 갇혀 있는 사랑은 누군가의 삶을 피곤하게 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위협하는 무기가 될 수 있다. 70대의 ‘순정’이 위험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