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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 618 : 조선의 역사 160 (선조실록 25)

두바퀴인생 2012. 6. 16. 04:03

 

 

 

 

 

한국의 역사 618 : 조선의 역사 160 (선조실록 25)

  

            

                                                    임진왜란 경과                                                                                                                    

                                                                                                                                                                                   

 

제14대 선조실록(1552~1608년, 재위: 1567년 7월~1608년 2월, 40년 7개월)                             

 

   

 일본군의 한강 도하 및 한양 점령

 

일본군도 한양을 그리 쉽게 점령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 못했다. 조선군의 강력한 방어막이 펼쳐져 잇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일본군의 기병 두어 명이 한강 남쪽 언덕에 도착하여 헤엄쳐 건너는 시늉을 하자 조선측 장수들은 얼굴빛을 잃고 부하들에게 말의 안장을 얹도록 명하니 군사들이 다 붕괴되었다.'라고 전한다.

 

도성 수비 책임자들도 성을 버리고 떠난지 오래였다. 그래서 일본군은 조선군의 아무런 저항도 없이 버려진 배를 이용, 한강을 도하하여 한양에 들어서니 흥인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조선군이 매복하고 있을지 몰라 선뜻 들어오지 못했다. 유인작전으로 생각하고 먼저 십여 명의 군사를 입성시킨 뒤에도 사방에 정찰병을 보내 수십 번을 탐지했다. 도성을 이렇게 버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던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수십 번을 탐지한 후에야 조선 군병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한양에 무혈 입성하였다. 사방 하늘에는 연기가 자욱하였는데, 궁궐은 이미 백성들이 다 불태웠으므로 일본군 지휘부는 종묘에 자리를 잡았다. 

 

한편 개성에 있던 선조는 일본군이 한양 입성 소식을 듣고 극도의 두려움이 사로 잡혔다. 선조가 개성이 더 이상 머물수가 없다고 하자 윤두수가 "오늘은 이미 어두워져 미쳐 떠날 수 없으니 내일 떠나소서"라고 하였으나 선조는 "오늘 당장 금교에 가서 자려고 한다"며 당장 출발하도록 독촉하였다.

 

일본군이 개성 코앞까지 오기라도 한 것처럼 오후 3~4시경 개성부를 황급히 떠난 선조의 어가는 밤중에 금교역에 도착했다. 이튼날 선조는 발이 밝자마자 금교역을 출발하여 흥의역을 거쳐 저녁에 보산관에 도착하였다. 선조는 곧바로 평양으로 도주할 것을 신하들과 의논했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이헌국이 선조에게 안성을 지나 오늘 용천에서 자고 내일 황주에서 자면 자연히 모레는 평양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윤두수는 선조가 이 땅을 버리지 않으면 조신들과 백성들이 어찌 싸움을 두려워하겠는가 하면서 선조의 요동으로 망명을 거두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런 간청에는 관심도 없었고 "여기서 용천이 얼마나 남았는가"하고 물었다.

 

선조의 귀에는 싸우자는 말은 전혀 들리지 않고 오로지 그의 뇌리에는 빨리 북쪽으로 도망가려는 생각으로 꽉차 있었다. 이때 선조는 적병이 얼마나 되는가? 절반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실인가? 라고 물었다. 그러나 신하들은 아무런 답변도 못했다. 선조는 비빈들과 그 가족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물은 것이다. 그의 머리속을 채우고 있는 것은 오로지 자신의 안전이었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 신하들이 계속 자신을 따라주어야 했다. 그래서 그는 5월 6일 황주에 도착하여 어가를 따른 신하들에게 가자(자급을 높여줌)했다.

 

다음날 평양에 도착한 선조는 먼저 사간원 사간 윤승훈, 사간언 정언 정사신, 사헌부 지평 남근을 체직시켰다. 자신의 가마를 빨리 따라오지 못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대신 김공량을 처벌하라는 대간들의 주장은 거절했다.

 

평양에 도착한 선조는 겨우 안정을 되찿았다. 일본군이 평양까지 급히 추격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전교를 내렸다.

"임금에게 진공하는 음식은 생물로 할 것이며 수량도 충족하게 하라. 동궁이하도 다 이 에에 따르도록 하라" 라고 했다. 전쟁 중이지만 자신과 가족들이 먹는 음식을 생물로 하라는 것이었다. 외침으로 군사들과 백성, 그리고 신하들이 어죽이 되고 있는 중임에도 나라의 지도자가 밥타령이나 하고 있었다.

 

 평양성에서 선조는 군사체제를 재점검했어야 했다. 그러나 선조는 점검은 커녕 조선을 되찿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장수들은 우왕좌왕했다. 그런 예가 애꿋은 부원수 신각을 처벌한 일이다. 5월 18일 비변사는 "부원수 신각이 도원수 김명원의 지시를 어겼으니 군법을 엄하게 보임으로써 기율을 엄숙하게 해야 한다"고 주청했다. 선조는 이에 선뜻 허락했다. 지난번 김공량 처벌을 주청한 상소에 대해서는 "초목 한 그루라도 함부로 죽이지 않아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겠는가."라며 반대하던 선조였다.

 

김공량은 본관 수원이며, 선조의 후궁 인빈(仁嬪) 김씨의 오빠이다. 누이가 선조의 총애를 받자 세도를 부렸다. 1591(선조 24) 좌의정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주장, 이른바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제기하자 영의정 이산해(李山海)와 결탁하여, 정철의 주장이 인빈 김씨의 소생 신성군(信城君)을 해치려는 음모라고 인빈 김씨를 통해 선조에게 고하게 하였다. 이로 인해 정철은 강계로 유배되고 호조판서 윤두수(尹斗壽) 등 서인(西人)의 영수가 파직되는 등, 서인 실권(失權)의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1592년 내수사별좌(內需司別坐)가 되었으나, 백성이 그의 실정을 들어 벌할 것을 청하자 강원도 산속으로 숨었다가 1608(광해군 즉위) 하옥되었다가 광해군의 명으로 풀려났으며, 인조가 즉위한 뒤 품계가 강등되었다.

 

신각은 처음에 김명원을 따라가 부원수가 되었으나 한강 싸움에서 싸움도 않고 김영원이 도망치자 신각은 김명원을 따라가지 않고 이양원을 따라 양주로 갔는데, 때마침 함경도 병사 이혼의 군사가 도착하였다. 신각은 이양의 군사를 합쳐 서울에 나와 노략질 하는 적을 맞아 쳐부수었으니, 왜군이 조선에 들어온 이래 처음 승전이므로 사람들이 모두 뛰면서 좋아했다. 그러나 도망쳤던 김명원이 신각이 자신을 따라오지 않았다며 조정에 불평하자 우상 유홍이 선조에게 신각을 급히 베어 죽이기를 청하여 선전관이 이미 떠났던 것이다. 그러자 신각이 전투에서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에서 사람을 뒤쫓아 보내 중지시키려 하였으나 미처 도착하기도 전에 신각은 이미 처형되고 말았다. 신각은 무인이지만 본디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신각은 죽었고 또 90세 된 늙은 어머니가 살아 있었으므로 듣는 사람들이 원통히 여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임진강 방어 실패

 

조선의 조정이나 장수들의 고질병은 적군을 두려워해 벌벌 떨면서도 아군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것이었다. 김명원의 잘못된 보고 때문에 부원수 신각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정에서는 김명원의 지휘권을 일부 박탈했다. 지사 한응인에게 군사 3천 명으로 임진강을 지키라고 명하면서도 도원수 김명원의 지시를 받지 말라고 한 것이었다.

 

임진강 방어전은 지휘권이 둘로 나뉜 상태에서 치러야 했다. 그래서 혼란은 예견된 것이었다. 한응인이 거느린 군사들은 여진족과 여러 차례 싸워본 실전경험이 있는 군사들이었다. 군사들이 한응인에게 적군의 군세를 살핀 다음에 싸우자고 건의 하였으나 한응인은 무조건 임진강을 건너라면서 서너 명의 목을 베어 죽었다. 한마디로 적정도 모른체 시도한 무모한 작전이었다. 적정도 살피지 않은채 적진으로 뛰어들어가라는 것이었다. 지휘권이 없는 김명원이 제어할 수도 없었다. 이일, 신립, 김명원. 한응인 등 조선의 장수들은 부하 목 베는 데는 천부의 맹장들이었던 것이다. 장수의 칼은 적을 베라라고 가지고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모르는 용장들이기도 했다. 

 

별장 유극량이 경험이 많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이기 때문에 "경솔히 나가지 말자"고 한응인에게 진언하자 장수 신할이 그의 목을 베려했다. 이에 분개한 유극량이 "제가 죽기를 두려워 하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나라 일을 그르칠까 두렵기 때문입니다."라며 자신에게 소속된 군사를 이끌고 먼저 임진강을 건넜다.

 

유극량이 분개하며 군사를 이끌고 임진강을 건너 적정을 살피며 전진했다. 조선 군사가 임진강을 건너 험한 지형으로 들어가자 적의 날쌘 군사들이 산 뒷쪽에 매복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일어나 조총을 쏘며 공격하니 조선 군대는 일시에 모두 패전해 달아났다. 유극량은 말에서 내려 땅바닥에 앉으면서 활로 적군 몇 명을 쏘아 죽인 다음 결국 적병에게 살해되었으며 장수 신할도 전사했다. 군사들은 달아나 강 언덕까지 왔으나 건너지를 못하고 절벽 위에서 스스로 뛰어내려 강물에 뛰어드니 마치 바람 속에 어지럽게 떨어지는 입사귀 같았다. 미처 강에 몸을 던지지 못한 군사들은 적군이 뒤에서 쫓아와 긴 칼로 내리 찍으니 모두 엎드려 칼을 받을 뿐이었다.(징비록)    

 

천혜의 장애물인 한강 방어선이 무너진 다음 이렇게 임진강 방어선도 조선군의 지휘계통 문란과 전투의지 상실로 허무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김명원과 한응인이 행재소로 돌아왔으나 조정에서는 이일을 문책하지도 않았다."라고 적고 있다. 군대는 군대대로 우왕좌왕 하였고 조정은 북으로 피난가는 일에 정신이 없어 패전에 대한 추궁을 할 여유도 없었다. 군율은 백성들이나 일반 병사, 군관들에게 적용되는 것이지 최고 지휘관에게 적용되는 것이 아닌 무용지물이었다.

 

 

 

 

한강,한성,임진강 방어 실패에 대하여......

 

이쯤에서 난 가슴이 너무나 답답하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일본군의 침공 소식에 조정이 피난을 떠나지 조선 군대는 지리멸렬되고 말았다. 장수들은 일본군의 모습만 보아도 도망치기에 바빴고 병사들도 바람처럼 흩어져 버렸다. 도섭이 가능한 지점에 배치되었던 조선군은 일본군이 나타나자 화살 한 번 제대로 쏘지 못하고 흩어져 버렸던 것이다. 장수들의 싸움에 대한 의지도, 목숨을 다해 나라에 충성한다던 충.효 그리고 의리와 명분 등 성리학의 문구는 이미 머리 속에서 떠난지 오래였다. 이러한 현상은 오랜 평화기를 누린 조선의 어쩔수 없는 당시 상황이었다.

 

군대의 장수들은 실전 경험도 없고 병법도 제대로 익히지 못한 문관들이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방어전에 임했다. 실전 경험이 있는 부하 장수들의 건의도 묵살한채 자신의 생각대로만 군대를 지휘했던 것이다. 만약 말을 듣지 않으면 부하들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고 칼로 베었던 장수들이었다.  적에 대한 소문만 듣고도 가슴이 떨리고 도망칠 궁리에 몰두했다. 부산진성 정발, 동래 부사 송상현, 조선 최고의 장수라는 도순변사 신립의 탄금대 패전 등 적과 싸움에서 이긴적이 없는 데다가 상주 전투에서 조선 최고의 병법가라는 이일이 패전하여 도망쳤고 또 탄금대 전투에서도 도망쳐 목숨을 부지했다. 그래서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요 버티고 싸우다가는 대부분 죽는다는 불안감이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선조가 피난을 떠나자 궁궐과 도성 수비를 맡았던 장수와 병사들이 욕설을 퍼부으며 조정에 등을 돌리고 대부분 떠났다는 사실과 선조가 떠나고 궁궐이 비자 난민들이 장예원을 비롯하여 노비 문서가 보관되어 있던 곳을 불을 지르면서 궁궐이 불타버렸던 것에서도 백성들의 조정에 대한 분노가 얼마나 심각하였던지를 알 수가 있다. 궁궐이 불타자 궁궐을 수비하던 군사들도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동안 조선은 권신들과 외척들의 부패가 심각하였고 사림 세력은 서로 파당을 나누어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삶에 대해서는 무관심하였다. 또 유교의 성리학 사상의 근간을 이루면서 평소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시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국방 체계가  무너진 것이 왜란을 대비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 우리들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다. 주변 국제정세는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다.

 

미국의 퇴조와 중국의 부상, 중국의 패권주의가 기승을 부리면서 주변국들과 마찰이 증가하고 있다. 한국과는 이어도, 일본과는 센카쿠 열도, 동남아시아 필리핀, 베트남 등과는 남지나해 도서를 두고 억지 주장으로 패권야욕을 평치고 있을 뿐 아니라 서북공정, 서남공정, 동북공정 등 역사왜곡으로 주변국들과 역사 및 국경 마찰을 조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신강-위그루 독립 움직임, 티베트 독립 움직임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투입하여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등 소수 민족 독립 움직임에는 에민하게 대응하고 있다. 최근 수십년 사이 급속한 경제성장으로 엄청난 발전을 도모하면서  도시와 농촌, 소수 민족 문제, 인권 문제 등 내부적인 문제점도 중국이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과제일 것이다. 또한 북한의 후원자로써 북한 정권을 유지시키는 데 완충지대로 한반도의 지배속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들이 바라는 것은 대중외교를 지혜롭게 전개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북한을 설득하여 개방.개혁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군비경쟁을 줄이고 평화로운 통일을 구현하는 것일 것이다. 만약 남북이 통일이 된다면 남북의 군사력과 경제력이 동북아 평화에 기여하는 주춧돌이 될 수 있도록 부국강병을 이루어 정치적으로는 중립화 정책을 구현하면서 상호공존  정책을 추구하여 나가야 할 것이다.   

 

 러시아는 언제라도 남진을 획책하고 중국.일본과는 경쟁관계에서 국익을 우선시하며 세력 확충을 시도하고 있다. 북한을 통과하여 러사와와 연결되는 시베리아 철도 부설과 두만강 일대의 경제자유화지역을 설치하여 경제협력을 이루고 시베리아 자원 개발에 참여하여 남북이 상호 경제적인 이득을 추구하면서 한국의 자본과 러시아, 북한의 인력이 결합한 개성공단 같은 경제모델을 다수 북한 지역과 러시아 지역에 설치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가치가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한국의 특정 지역에 러시아가 부동항으로 저렴하게 이용이 가능한 무역 중간 기지도 고려해 볼 방안도 있을 것이다. 러시아와 한국의 긴밀한 협력은 중국과 일본을 견제하는 의미있는 역활도 가능할 것이다.  

 

한편 일본은 세계 최고의 부자국가로 성장해오면서 경제력을 뒷받침한 군사력 증강은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은 언제라도 핵무기를 만들 수 있으며 우주 개발에 공을 들이고 있다. 또 그들은 서해로 진출을 시도하고 있으며 한국과는 독도, 중국과는 센카쿠 열도, 러시아와는 북방 도서 문제로 자국의 국익과 세력 확산을 시도하고 있다. 일본에게는 한반도의 불행이 그들에게는 행복이다. 그들은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긴 역사를 통해 지속적으로 지배야욕을 시도하여 왔던 것이다. 군국주의의 야욕을 펼치면서 무능하고 부패하였던 조선을 합병하여 36년 동안 철저하게 인명과 재산을 수탈하면서 지배하였고, 미국과 벌인 전쟁인 태평양 전쟁 패전 후 무조건 항복하였으나 전후 그들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경제력을 부흥했으며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지금은 다시 군사대국을 꿈꾸고 있다.

 

북한은 김씨 세습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핵무기를 개발하는 등 군사대국을 지향하고 있으며 한국과는 공존하기 힘든 반쪽 권력체제이다. 그들은 서해해전, 천암함 사건, 연평도 포격 등 수많은 도발을 감행하여 왔으며 언제라도 한국의 서울 및 수도권 일대를 불바다를 만들 것이라면서 공갈.협박을 시도하고 있는 한편, 한국내에서 지속적인 친북, 종북 등 동조세력 확장을 시도하고 있다. 북한 문제는 우리들만이 해결할 문제는 아닌 듯하다. 주변 강대국들과 외교적인 공조를 이루어 북한이 스스로 개혁개방의 문을 열고 경제적인 부흥을 이루어 남북이 서로 체제를 인정하고 공존하면서 저절로 흡수통일이 되는 방안이 가장 현명한 방안이 될 것이다. 그것을 이루려면 우리 나라의 내부적인 체질 개선과 강력한 경제대국을 이루면서 세계적인 모범국가로 발돋움하여 지혜로운 대중, 대미, 대러, 대일 외교를 펼쳐 다자공론을 이끌어낼 수 있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같은 인재가 나타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동안의 경제발전을 통해 배가 좀 부르다고 정신적으로 부패하기 시작하였다. 정치권은 권력투쟁에 여념이 없고 이념과 사상을 달리하는 정치 새력끼리 파당을 이루어 국론은 분열되고 국방은 천시되고 있으며 정치.사회.종교적인 부패는 그 끝을 모를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극심한 양극화, 어려운 취업, 초고령화 사회, 초저출산 나라, 취업과 결혼, 자녀 양육이 어렵거나 기피하고 이혼, 계약결혼, 동거, 불륜, 매춘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정의와 공정이 사리지고 불의와 불공정이 판을 치는 나라, 교육계 비리는 그 끝을 모르고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교육이 융성하는 나라, 군이 갈 곳이 없어 방황하고 군기지 건설이 어려운 나라, 전력대란이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나라, 핵발전소가 언제 대형사고를 일으킬지 모른 나라, 장바구니 물가가 하루가 다르게 오르고 거짓과대과장 광고로 소비자를 봉으로 생각하는 나라, 사기.도박.위조.거짓말이 판을 치는 나라, 권력형 비리가 항상 존재하는 나라, 법조계는 스폰서 검사, 그랜저 검사 등 기업과 자본가와 밀착하여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법과 질서가 무너지고 서민들의 인권만 수탈하는 나라,  죽어도 죽지 못해 일인시위로 억울함을 호소해도 법과 제도가 가진자 편인 나라, 국방을 천시하고 군대가기를 꺼리며 지도층이 솔선하여 군을 기피하는 나라, 사회 곳곳이 비리와 부패로 썩지 않은 곳이 없는 나라......한마디로 끝이 없다.

 

40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라 돌아가는 꼴이 너무나 흡사하다. 지금 이 나라는 '풍전등화'의 상황이다. 풍전등화라는 말은 언제 나라가 망할지를 모르는 상태를 가리켜 이르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