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547 : 조선의 역사 89 (성종실록 17)
한국의 역사 547 : 조선의 역사 89 (성종실록 17)
제9대 성종실록(1457~1494년, 재위 1469년 11월 ~ 1494년 12월, 25년 1개월)
9. 성종시대의 역사적인 평가 (계속)
이렇게 이루어지는 성종 초년의 치국 내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리하여 수렴청정과 원상(院相)의 보좌라는 군주 체제의 보완 장치는 이 후 비슷한 경우 모범 사례로 거론되지만 당시의 역사적 상황들은 결코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았다. 즉 하나의 기준으로 모든 척도를 잴 수 없다는 진리를 간과했던 것이다. 더불어 당시의 구성원들의 개인적 능력과 충성의 정도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먼저 그 동안의 관례에 따라 예종이 승하한 뒤 곧바로 왕위 계승자로 지목된 성종은 면복(冕服)을 입고 근정문(勤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즉 그것은 전왕(前王)이 서거하면 곧바로 세자 내지는 왕으로 정해지는 사왕(嗣王)이 그날로 즉위를 하고 교서를 반포하는 것이었다. 예종이 진시(辰時) 즉 아침 7시에서 9시 사이에 서거(逝去)하고 신시(申時) 즉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 즉위한 것이니 그 급박함은 그야말로 하루종일 대궐 안팎으로 먼지가 자욱했다는 표현으로 대신할 수 있을 듯하다.
다음으로 의정부에서 백관을 거느리고 조복(朝服) 차림으로 진하(陳賀)하였으며, 종묘 · 영녕전(永寧殿) · 영창전(永昌殿) · 사직(社稷)에 예종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를 고하였다. 또한 석전(夕奠)을 거행함으로써 당일의 절차를 모두 끝내었다.
비록 정사는 조모인 정희왕후와 원상들의 도움으로 처단한다고는 하지만 이제 그것은 왕 자신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었고 이를 위한 준비 수업을 해야만 하였다. 새벽에 침소에서 일어나 일과를 시작하면서 경연(經筵)을 통해 경전의 내용과 뜻을 완전히 습득할 때까지 익히는 과정을 되풀이함으로써 부족한 공부를 단시간에 채우고자 하였다.
왕은 이에 짜증이나 싫증을 내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철저히 스스로 단련하여 학문이 정점에 달한 이후에는 반대로 신료들을 지도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초기의 경연을 통한 학문적 성숙은 이 후 성종조 유교 정치 문화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성종이 이렇게 서서히 군주 수업을 받고 있는 동안 정희왕후와 정치권은 왕권의 안정적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세조 때 많은 군공(軍功)을 세우면서 총애를 받던 구성군(龜城君) 준(浚 : 임영대군 2남)에 대해 견제를 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종조를 지나면서 구성군은 이미 그 지위가 영의정에까지 이르렀고, 중외의 신망이 두터워 그의 정치력은 왕실 비호 세력의 범주를 넘어서는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어린 군주가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정치력은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었다. 따라서 예종의 서거 뒤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세력 관계에서 왕실의 혈통 즉 예종과 덕종의 혈손을 제외하고서는 그의 입지가 가장 단단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왕위계승자가 정해짐에 따라서 그의 존재는 오히려 왕권을 위협하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그에 대한 대응이 필요하게 되었다.
신숙주 · 한명회 · 정인지 등의 원상과 대신들은 성종이 즉위한 후 곧바로 이러한 문제점을 구성군의 역모라는 정치적 치명타로서 제거하고자 하였다. 정희왕후도 이러한 대신들의 인식과 그 뜻을 같이하면서도 주저하였다. 구성군은 왕실의 지친이고 또 세조와 예종이 총애했던 이유에서였다. 결국 당시 수렴청정을 하던 정희왕후로서는 성종의 왕권을 안정시켜야 된다는 절대적 명제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마침내 1470년(성종 원년) 1월 14일에 이를 허락하였던 것이다. 이 후 구성군은 공신(功臣)의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고 직첩(職牒)을 회수당한 뒤 경상도 영해(寧海)에 1479년(성종 10) 1월 28일 별세할 때까지 안치되었다. 이 구성군 사건은 결국 왕위 계승과 왕권의 안정이라는 대의에 의해서 비롯되고 또 이를 위해 그 결론이 맺어졌다.
왕권의 안정을 위한 이러한 예비적인 조치가 이루어진 뒤 정희왕후는 성종의 친부모인 의경세자(懿敬世子)와 수빈(粹嬪) 한씨, 그리고 예종의 세자빈이었던 장순빈에 대한 예우의 문제에 대한 것을 정하였다. 즉, “장순빈(章順嬪)의 시호는 휘인 소덕 장순 왕후(徽仁昭德章順王后)로 하고, 능호는 공릉(恭陵)으로 하고, 의경세자의 시호는 온문 의경왕(溫文懿敬王)으로 하고, 묘호는 의경묘로 하고, 능호는 경릉(敬陵)으로 하고, 어머니 수빈(粹嬪)의 휘호는 인수 왕비(仁粹王妃)로 일컬어 올리도록 하라.”라고 하여 성종의 즉위에 따른 존호의 변경에 대해 결정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성종의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자연적으로 선왕의 후계자가 `자(子)'가 되는 예에 따라 예종 빈인 장순빈을 장순왕후로 올림으로써 왕실의 존엄함을 보이는 동시에 성종의 즉위가 정당한 절차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는 것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후에도 성종은 3왕후, 즉, 할머니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 · 생모 덕종비 인수왕비(소혜왕후) · 예종비 장순왕후 한씨를 모두 훌륭히 받들어 모자람이 없었다고 기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