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340 : 고려의 역사 108 (제13대 선종실록 2)
한국의 역사 340 : 고려의 역사 108 (제13대 선종실록 2)
제13대 선종실록
(1049~1094, 재위 1083년 10월~1094년 5월, 10년 7개월)
1. 선종의 중도정치와 고려 문화의 융성(계속)
한편 성종 대부터 일본과의 무역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1084년부터 자주 눈에 띈다.
1084년 6월 무자일 일본 축전주의 상인 신통 등이 와서 수은 50근을 바친 이래, 이듬해 2월 경축일에는 대마도 구당관이 사절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또한 1087년에는 일본 상인 중원친종 등 32명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고, 그해 7월에는 대마도 원평 등 40명이 와서 진주, 수은, 보검, 우마 등을 바친 기록이 있다. 이후에도 해마다 일본 상인과 사신들이 고려를 방문하여 토산물을 바쳤다.
이는 곧 선종 대부터 일본과의 무역이 본격화되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당시 일본은 하나로 통일된 국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려와 정식으로 외교관계를 맺지는 못했다. 따라서 상인과 대마도 관리들이 중심이 된 조공무역 형태를 띨 수밖에 없었다.
선종 대의 이러한 정치와 외교를 이끌었던 인물은 이정공, 최석, 김양감, 유흥, 왕석, 노단, 최사량, 문황, 최사재, 박인량, 서정, 김상기, 소태보 등이었다.
즉위 후 조정 개편을 하지 않은 채 문종 말기 인물들을 그대로 포진시켰던 선종은 1086년 4월 계축일 대폭적인 조정 개편을 단행하면서 이들 인물들을 요직에 배치했다. 이정공을 문하시중, 최석과 김양감을 문하시랑 평장사, 유흥과 왕석을 중서시랑 평장사, 노단을 상서좌복야, 최사량을 중추원사, 문황을 지중추원사로 각각 임명한 것이다.
이 당시 조정 개편에서 특이한 점은 문하시랑 평장사와 중서시랑 평장사를 각각 한 명에서 두 명으로 늘렸다는 점이다. 정2품 고급 관료인 평장사의 수를 이렇게 늘렸다는 것은 정치.외교 및 문화 전반에 걸쳐 고려 사회가 더욱 복잡해지고 다각화되었다는 의미이다. 특히 대국으로 섬기는 국가가 거란 하나에서 송이 보태지고, 외교관계에서도 일본 등이 가세함으로써 대외문제를 관할할 평장사를 따로 둘 필요가 있었던 것이었다.
1086년의 조정 개편 이후 대폭적인 인사는 한동안 없다가 1089년에 최사재가 참지정사, 박인량이 동지 중추원사, 서정이 삼사사, 김상기가 우산기상시로 각각 임명되었고, 1092년 소태보가 참지정사에 오르면서 조정은 일부 물갈이가 되었다.
이 같은 정치적 상황 이외에 선종 대에는 문화 분야에서도 발전된 모습을 보인다. 특히 불교와 유교 양측이 화합을 도모하는 가운데 고루 발전하게 되었다.
선종은 문종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장려하였는데, 그 일환으로 1084년 처음으로 승과를 설치하여 승려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길을 마련하였다. 물론 승직에 불과한 것이지만 승려가 진사 규정에 준하여 3년에 한 번씩 승직에 선발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이전에는 없던 획기적인 조치였다.
또한 이 시기에는 대각국사 의천이 밀항하여 송나라에 유학을 떠남으로써 고려 불교 발전에 하나의 전기를 마련하였는데, 1년 10개월간 송나라에서 머문 의천이 돌아오면서 천태종이 창종되고, 고려 불교는 선.교 양종의 화합을 모색하게 된 것이다. 또한 회경전에 13층 금탑을 세우고, 인예왕후의 청에 따라 천태종의 본산인 국청사가 건립되었으며, 의천에 의해 많은 불경이 도입되어 간행됨으로써 팔만대장경의 기틀이 되는 속장경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불교의 이 같은 발전과 더불어 유교의 발전도 병행되었는데, 1091년 예부의 주장으로 국학에 공자의 제자인 안회를 비롯한 72현의 상을 그린 벽화가 조성되었다. 72현의 차례는 송나라 국자감의 예를 따랐고, 그 복장은 중국 십철을 모방한 것이었다.
국자감에 공자의 제자 72현의 상을 그려넣었다는 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최고의 학문으로 삼겠다는 의지에서 한층 더 나아가 그를 종교적 대상으로 격상시켰다는 의미이며 이는 고려 유학자들이 그토록 바라던 숙원사업의 하나였다.
이외에도 1091년 송나라 왕의 요청으로 수백 권의 서적을 송에 보내준 것도 고려가 당시 문화 선진국이었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이처럼 유학과 불교를 고루 진작시켜 학문과 종교의 조화를 꾀하고, 송과 거란을 모두 종주국으로 인정하여 중립외교를 정착시킨 선종은 1093년 3월에 과로로 병상에 눕게 된다. 하지만 회복하여 다시 정사를 돌보다가 이듬해 5월 병이 심해져 재위 10년 7개월 만에 향년 46세로 숨을 거두게 된다.
그는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감성이 풍부하여 많은 시를 남겼다. 하지만 전하는 것은 거의 없고, 다만 거란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시가 남아 있다.
찬이슬 내려 바람은 거세지만
가을 하늘 하도 맑아
피향전 깊은 밤에도 노래소리 들리는구나
분분한 인생은 한낱 꿈과 같은니
영화를 탐한들 무슨 소용 있으리
금잔에 술이나 부어 마음것 즐기세나
선종의 능은 인릉으로 개경 동쪽에 마련되었다.
2. 선종의 가족들
선종은 3명의 부인에게서 4남 3녀를 얻었다. 정신현비를 비롯하여 그의 세 부인은 모두 인주(경원) 이씨 집안에서 배출되었는데. 제1비 정신현비가 1녀, 제2비 사숙왕후가 헌종을 비롯 1남 2녀, 제3비 원신궁주가 3남을 낳았다. 이들 가족 중 세 왕비의 삶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한다. 기타는 헌종 실록에서 다룬다.
정신현비 이씨 (생몰년 미상)
정신현비 이씨는 인주 사람으로 평장사 이예의 딸이다. 그녀는 선종이 국원공으로 있을 때 결혼했다가 남편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죽었다. 소생으로는 딸을 하나 낳았으나, 그녀가 예종의 왕비 경화왕후이다.
다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선종이 등극하기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에 사망 후에 선종 묘정에 합사되지 못햇다.
사숙왕후 이씨(생몰년 미상)
사숙왕후 이씨는 인주 사람으로 공부상서를 지낸 이석의 딸이다. 그녀 역시 정신현비와 마찬가지로 선종이 국원공으로 있을 때 시집왔으며, 선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녀는 연화궁에 머물렀으므로 연화궁비라 불리다가 아들 헌종이 즉위한 후에 섭정을 하게 되면서 궁전 이름을 중화전으로 바꿨다.
섭정을 실시하게 되자 그녀는 중화전에 영녕부를 설치하고 군사와 행정을 포함한 일체의 정사를 처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의 섭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왕이 어린 탓에 다섯 왕숙들이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는 가운데 이자의가 한산후 왕윤을 왕위에 올리기 위해 반란을 일으키려 했고, 이를 알아챈 왕숙 계림공이 이자의 세력을 물리치면서 왕위마저 차지하게 되어 태후 역시 1년여 만에 섭정을 중단하게 되었다.
소생으로 헌종과 수안택주, 그 밖에 이름이 전하지 않는 공주가 있으며, 사망 후 예종 2년 1107년에 왕의 명에 의해 선종 사당에 합사되었다.
원신궁주 이씨 (생몰년 미상)
원신궁주 이씨는 인주 사람으로 평장사 이정의 딸이다. 선종 즉위 후 입궁하였으며, 칭호를 원희궁비라 하였다. 소생으로 한산후 윤을 포함하여 3남이 있었다. 그런데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녀의 오빠 이자의가 왕윤을 왕으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미다 실패하고, 이 바람에 원신궁주와 왕윤을 비롯한 세 아들은 모두 유배되어 귀양생활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