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97 : 백제의 역사 43 (제31대 의자왕 2)
한국의 역사 97 : 백제의 역사 43 (제31대 의자왕 2)
백제의 황혼을 장식한 두 영웅
하늘이 낳은 불세출의 재상, 성충(?~656년)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의자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했던 이 말은 성충이란 인물이 얼마나 뛰어난 인물인지를 말해준다. 그야말로 백제의 운명이 그의 어께에 얹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의자왕이 말해듯이 성충만 살아 있었다면, 백제는 패망의 비운에 처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삼국사기>에는 그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지 않지만,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비교적 상세하게 나온다. 신채호는 아마도 <해상잡록>이라는 책에서 성충에 대한 기록을 취한 듯한데, 불행히도 <해상잡록>은 현재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상고사>에 실린 내용이 역사적인 사실과 상당히 일치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신채호의 기록을 바탕으로 성충의 삶을 정리한다.
성충은 부여씨로서 백제 왕족 출신이며, 문리에 깊고 병법에 밝아 가히 하늘이 낳은 재사라 할 만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꾀가 많가로 이름이 높았는데, <조선상고사>에는 그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소개되고 있다.
성충은 어릴 때부터 지모가 뛰어나서 일찍이 예(동예, 한반도 낙랑)의 군사가 침략해오자, 고향 사람들을 거느리고 산중턱에 웅거하고 지키는데, 늘 기묘한 계교로 많은 적을 죽였다. 그래서 예의 장수가 사자를 통해 궤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대들이 나라를 위하는 충절을 흠모하여 약간의 음식을 올리오."
사람들이 궤를 열어보려 하였으나 성충이 이를 굳이 말리면서 불 속에다 넣게 했다. 그 속에 든 것은 벌과 독충들이었다. 이튼날 또 예의 장수가 궤를 하나 보냈다. 모두 이것을 불에 넣으려하니, 성충이 그것을 열어보게 하였다. 그 속에는 화약과 염초 따위가 들어 있었다. 사흘째 되는 날 적은 또 하나의 궤를 보내왔는데, 성충은 그것을 톱으로 켜게 하였다. 그러자 궤에서 피가 흘렀다. 궤를 열어보니 칼을 품은 자객이 허리가 끓어져 죽어 있었다.
그 뒤 의자왕이 그에 관한 소문을 듣고 불러 앞일에 관해 묻자, 성충은 신라가 쳐들어 올 것리라고 말하면서 그에 대한 방비책을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자 의자왕이 물었다.
"신라가 어디로 쳐들어 올 것 같소?"
성충이 확신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선대왕(무왕)께서 성열성 서쪽의 가잠성 동쪽 지역을 차지하시니, 신라가 원통해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하여 신라는 반드시 가잠성을 공격해 올 것입니다."
"그러면 가잠성 수비를 증강시켜야 하지 않겠소?"
"가잠성주 계백은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장수로 비록 신라 군사가 포위하여 공격한다해도 쉽사리 깨뜨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의 정병이 가잠성을 공격해오면 우리는 가잠성을 구원한다일컫고 다른 곳을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곳을 치는 것이 좋겠소?"
"신이 들으니 대야주 도독 김품석이 김춘추의 딸 소랑의 남편이 되어 권세를 믿고 군사와 백성을 학대하고 음탕과 사치를 일삼아 원한의 대상이 된 지 오래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 나라에 국상이 있다는 소문을 들으면 수비가 한결 소홀해질 것이므로, 신라군이 가잠성을 공격하는 때를 이용하여 대야성을 공격하면 신라군이 대야성이 위급해지더라도 쉽게 구원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 군사가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공격하면 신라 전국이 크게 소란해질 것이니 이를 쳐 멸망시키기는 아주 쉬울 것입니다."
"그대같은 지략가는 고금에도 드문 일이었소."
그래서 의자왕은 성충의 비상한 지략과 인물됨을 알아보고 그를 상좌평에 임명하고 그의 전략에 따라 윤충(성충의 아우)에게 군사를 주어 대야성을 공략하게 하였다. 윤충은 품석에게 아내를 빼앗긴 신라 비장 금일을 이용하여 대야성 내부를 교란시켜 무너뜨리고, 그 주변의 40여 개의 성도 함께 얻었다.
대야성은 백제에서 신라로 가는 길목이며 군사적 요충이었다. 따라서 대야성 함락은 신라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백제에게 기선을 제압당하는 원인이 되었다.
이후 성충은 의자왕의 눈귀와 손발이 되어 전략을 수립하고 전술을 구사하였는데, 고구려에 가서 연개소문을 만나 화친 조약을 얻어내기도 하였다. 이 일로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충이 고구려에 가서 이해를 따져 연개소문을 달래서 동맹 조약을 거의 맺을 즈음, 연개소문이 갑자기 성충을 멀리하여 여러 날을 만나보지 못했다. 성충이 의심스러워 탐지해보니, 신라 사신 김춘추가 와서 고구려와 백제의 동맹을 막고 신라와 동맹을 맺으려 하였다.
그래서 성충은 곧 연개소문에게 글을 보냈다.
"공이 당과 싸우지 않으면 모르지만, 만일 당과 싸운다면 백제와 화친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오. 왜냐하면 당이 고구려를 칠 때 번번이 양식 운반의 불편으로 패하였으니, 수나라가 그 분명 본보기요, 이제 백제가 만일 당과 연합하면 당은 육로인 요동으로부터 고구려를 칠 것이며 배로 군사를 운반하여 백제로 들어와서 백제의 쌀을 먹어가며 남에서부터 고구려를 칠 것이니, 그러면 고구려가 남북 양면으로 적을 받게 될 것인즉, 그 위험이 어떠하겠습니까? 신라는 동해안쪽에 나라가 있어 당의 군사 운반편리가 백제만 못할 뿐 아니라, 신라는 일찍이 백제와 화약하고 고구려를 치다가 마침내 백제를 속이고 죽령 밖 고현 안의 10여 군을 함부로 점령하였음은 공이 잘 알고 있을 것이오. 신라가 오늘에 고구려와 동맹한다면 내일에 당과 연합하여 고구려의 땅을 빼앗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겠습니까?"
연개소문이 이 글을 보고는 김춘추를 가두고 죽령 밖 욱리하 일대의 땅을 빼앗으려고 하였다. 이리하여 성충은 고구려와 동맹을 맺고 돌아갔다. 김춘추도 사태의 위급함을 알고 땅을 내놓겠다고 연개소문을 안심시킨 다음에 겨우 풀려나 신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당시 김유신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결사대 1만의 병력을 대리고 국경에서 대기하다가 김춘추가 살아서 돌아오자 김춘추를 호위하여 서라벌로 철수하였다.
<조선상고사>에는 성충의 계책으로 백제가 당의 강남 땅을 장악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성충은 당이 반드시 고구려를 침략하게 될 것이라 하면서, 그때를 이용하여 당의 강남 땅을 공격하면 능히 장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의자왕은 이 말을 믿고 있다가 당이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입하고 안시성을 무너뜨리지 못해 교착상태에 빠지자, 성충의 계책을 실행했는데, 계백에게 명하여 신라의 후방을 습격하고 성열 등 7개 성을 점령하고, 또 윤충을 보내 부사달 등 10여 개 성을 점령하였으며, 수군으로 당나라의 월주를 점령하였다는 것이다.
신채호가 어떤 사료를 보고 이와 같은 내용을 담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전혀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가 신라의 성을 장악했는데, 7개, 10개, 30개, 40개 성이라고 나오지만 구체적인 지명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의자왕 재위 15년에 말갈, 고구려와 함께 신라 30여 성을 함락시킨 뒤부터 의자왕은 기고만장하여 사치에 빠지고 향락에 젖은 것을 볼 때, 당나라의 강남 땅을 장악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다. 그러나 구체적인 내용을 <삼국사기>에는 기록이 없는 것은 <삼국사기> 편자들의 역사 가치관의 한계일 것이다.
어쨌던 성충과 관련된 일련의 일화에서 보듯이, 그는 언변이 뛰어나고 논리가 명확하여 정세 파악에 남다른 뛰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그도 불운을 피해갈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백제에는 임자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좌평의 직위에 있으면서 의자왕의 비위를 잘 맞추고 듣기 좋은 소리만 골라서 하는 간신이 있었다. 그에 비해 성충은 절개가 굳어 그릇된 행동은 그냥 넘기지 않았다. 때문에 의자왕이 향락에 젖어 지내자, 성충은 의자왕의 행동을 비판하여 간언하였는데, 임자는 성충이 그간의 공을 믿고 거만해져서 왕을 무시한다고 하였다. 이 소리를 들은 의자왕은 격분하여 성충을 감옥에 가두고 음식을 주지 못하게 하였다.
감옥에 갇힌 성충은 여러 날을 먹지 못해 굶어 죽을 처지가 되었는데, 죽기 전에 의자왕에게 글을 올려 간하였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않는 것이니, 한마디 말만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이며 무릇 전쟁에는 지형을 잘 선택해야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백강)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해야만 방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말을 남기고 성충은 656년 3월에 생을 마감하였다. 생명이 꺼져가는 중에도 이렇듯 신하의 도리를 다하였고, 나라의 운명을 염려했지만, 의자왕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백제의 멸망을 자초했다.
황산벌에서 피어난 불멸의 꽃, 계백(?~660년)
성충과 흥수는 백강의 언덕을 지키고, 탄현의 길롬글 막아 적군이 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의자왕에게 충고했었다. 의자왕은 이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군에게 백강 진입을 허용하였고, 신라군을 탄현 안으로 끌여들엿 일시에 공격하자는 달솔 상영 등의 주장을 따랐다. 그러나 막상 백강과 탄현 길이 열리자, 당군과 신라군은 노도처럼 밀려왔고, 그 위세가 강해 막아설 수가 없었다. 당황한 의자왕은 좌평 충상과 달솔 계백, 상영 등에게 5천의 결사대를 주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군을 저지토록 했다.
계급상으로 5천 결사대의 총지휘자는 좌평 충상이지만, 결사대를 이끌 사람은 장수인 계백과 상영이었다. 그런데 상영은 당군에게 백강을 열어주고 신라군을 탄현 안으로 끌여들여야 한다는 엉터리 주장을 한터라 의자왕의 신임을 잃은 상태였다. 따라서 5천 결사대의 실질적인 지휘는 계백이었다.
백제의 운명을 지고 황산으로 향한 계백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일설에는 그가 부여씨로서 왕족이라고도 하지만,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좌평에 이어 제2품인 달솔의 위치에 있었던 것을 보면, 귀족 출신인 것은 분명하다. 백제의 귀족 중에 계씨는 없었기에, 계백은 이름일 것이다. 또한 부여씨를 쓰는 왕족의 경우 성씨를 떼고 이름만 기록한 경우가 많아, 계백을 부여씨로 보는 것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신채호가 <조선상고사>에서 계백의 성씨를 부여씨로 서술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5만의 신라군을 맞아 싸우게 된 계백은 싸움에서 질 경우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이 신라인의 노비로 살며 치욕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직접 처자를 죽이고 전장으로 나갔다.
이 행위를 놓고 후대의 학자들은 비난과 찬사로 견해가 엇갈린다. 조선 초기의 학자 권근은 그의 행동을 무도하고 잔인하며 도의에 어긋나는 것이라며 먼저 사기를 떨어뜨려 싸우기도 전에 굴복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동사강복>의 저자 안정복은 권근의 비판은 병법을 전혀 모르는 데서 기인한 잘못된 논리라며, 게백이 처자를 죽이고 전장으로 떠난 것은 사욕과 사리를끓고 죽을 결심으로 싸우겠다는 전의를 표출한 것이라고 옹호했다. 어쨌던 계백은 백제의 운명이 다하였다는 생각을 했을 지도 모른다. 그는 선대 무왕 대부터 백제 장수로 전장터를 누빈 뛰어난 장수였다. 의자왕이라는 군주의 사치와 폭정을 곁에서 눈을 통해 보아왔고 여러 명의 충신들이 죽거나 쫓겨나갔고 간신 임자의 간언에 빠져 충언을 멀리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진 의자왕으로는 위기의 백제를 다시 부활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하였는지도 모른다. 이번 전투가 어쩌면 자신에게 마지막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을 하였을 것이다.
이것은 고대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 장군이 마지막 전투인 자마평원에서 벌어진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과 벌인 '자마전투' 하루 전, 두 장수가 양군이 포진한 언덕위에서 회담을 하면서 한니발 장군이 한 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는 이 전투가 카르타고의 국운을 좌우하는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로마군과 싸워 한 번도 패전한 적이 없는 그로써는 승리를 확신하면서도 이번 전투에서 만약 패전한다면 카르타고는 멸망할 수 밖에 없는 상황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 로마군 장수인 스키피오 장군은 한니발과 수차례 전투에 참가하여 패전하면서도 그의 전술을 면밀히 파악하였고 그에 대한 대응전술을 개발하였다는 사실을 한니발 장군은 간과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미 국운이 기울기 시작한 카르타고를 이 한판의 전투에서 결판이 날 것이라는 불안감이 한니발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승리한다면 4만 명의 로마군 목숨과 전리품 뿐이지만, 만약 자신이 패전한다면 5만 명의 군사들의 죽음과 카르타고의 멸망이라는 점이었다. 결국 그의 희망 사항과는 다르게 자마전투에서 전투결과는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완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카르타고는 로마의 속국이 되었고, 한니발은 수 년 후 카르타고를 떠나 소아시아로 망명하여 소아시아 왕과 로마 타도의 재기를 꿈꾸었으나 결국 실패하고 도망자가 되어 카스피해 근방의 비타비아 왕국에서 숨어지내다가 로마군의 추격을 받고 독배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끓는다.
당시 사람들이 계백의 행동을 높이 평가하고, 적국인 신라인들조차 계백을 존경했던 것을 보면, 안정복의 주장이 삼국시대 당시의 가치관에 부합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가 처자를 죽인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위에서 말한 것처럼 백제의 부흥은 이미 끝났다고 계백은 판단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전장에 임하며 자신에게는 이 전투가 어쩌면 마지막 전투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어쨌던 계백은 처자를 죽이고 비장한 각오로 황산으로 떠났다. 황산에 이른 그는 세 개의 진을 치고, 싸움을 하기 전에 병사들에게 비장한 목소리로 일장 연설을 했다.
" 옛날 월 왕 구천은 5천의 군사로 70만의 오나라 대군을 격파하였다. 오늘 우리는 각자 분발하여 싸우고 승리하여 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이렇듯 짧은 문구만 실려 있지만, 문맥으로 봐서 계백은 구천의 5천 군대는 70만도 이겼는데, 결사대 5천으로 신라의 5만 군대를 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라고 하면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았을 것이다. 또한 자신은 이미 처자를 죽이고 온 몸이라 죽을 각오로 싸울 준비가 되어 있다는 비장한 말과 병사들 역시 개인의 처지를 생각하지 말고 오직 나라를 위해 싸우면 반드시 이길 수 있다는 내용으로 설파했으리라 생각된다.
계백의 확신에 찬 말을 듣고 병사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그것은 일당백의 전투력을 나타냈는데, 신라 장수 김흠춘과 김품일이 네 번에 걸쳐 백제군을 공격하였지만, 백제군을 뚫지 못했다. 그러자 신라군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졌고, 흠춘과 품일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극단적인 사기 진작책을 구사했다. 흠춘은 아들 반굴을 적진에 뛰어들어 죽게 만들었고, 품일 또한 아들 관창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계백은 16세의 소년 관창을 사로잡았을 때, 처음에는 살려 돌려 보냈다. 그러나 관창이 다시 달려오자, 그의 머리를 벤 뒤;, 말안장에 매달아 신라 진영으로 보냈다. 계백은 여기에서 큰 실수를 한 셈이 되었는데, 신라군의 의도대로 관창의 머리를 베어 보낸 것이 신라군의 계략에 넘어간 꼴이 되었던 것이다. 흠춘은 관창의 머리를 잡고 피를 닦으며 부하들에게 전의를 촉발시켰고, 그것은 신라군의 사기를 되살리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황산벌 전투 재현
전장터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 하기는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옆 전우가, 그것도 사령관의 아들이라는 병사가 적의 칼에 목이 베이는 죽음을 당하였는데 가만히 있을 병사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의 전투도 마찬가지이다. 옆 전우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면 그것을 본 병사들이 울분에 찬 총구를 적을 향해 불같이 사격하거나 적진을 향해 돌진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한국 전쟁시 중공군의 모택동의 아들이 전사하였고, 미군은 많은 장군들의 아들이 앞장서서 한국전에서 목숨을 잃었다. 모두가 신라 장군 흠춘의 병법을 혈육의 죽음을 통해 군의 사기를 진작시킨 사례일 것이다.
전의에 불타는 신라군 5만이 밀려오자, 계백의 5천 결사대도 죽기를 각오하고 막아섰지만, 중과부적이라 결국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러자 좌평 충상과 달솔 상영은 목숨을 구걸하며 항복하였고, 계백은 끝까지 싸우다가 5천 결사대와 장렬하게 전사했다. 그는 만고에 남는 충신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널리 후세인들에게 희자되고 있다. 사람은 죽음 앞에서 진정한 그의 인간성이 나타나고 위기시에도 마찬가지이다. 충절과 애국은 자신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충난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수락산 언덕에는 계백의 묘라고 불리는 무덤이 하나 있다. 아직까지 증명되지는 않았으나, 무덤에 얽힌 이야기와 위치 등으로 봐서 계백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다.
조선 숙종 대인 1688년에 이 무덤 앞 쪽에 계백의 위패를 모신 충곡서원이 창건되었고, 계백 장군 위패 좌우로 조선 시대 충절의 대명사인 백팽년, 성삼문 등을 비롯한 17현의 위패가 함께 배향되어 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긴다지만 충신은 영원히 이름을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