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역사 34 : 고구려 역사 17 (제14대 봉상왕 )
한국의 역사 34 : 고구려 역사 17 (제14대 봉상왕 )
제14대 봉상왕(치갈왕)
봉상왕(烽上王, ?~300년, 재위 292년~300년)은 고구려의 제14대 왕이다. 이름은 상부(相夫) 또는 삽시루(歃矢婁)이고 서천왕의 아들이다. 치갈왕(雉葛王)이라고도 한다.
기원전 37년 ~ 668년
476년 고구려 전성기 때의 지도
공용어
고대 한국어
수도
졸본 (기원전 37년 ~ 3년)
국내성 (3년 ~ 427년)
평양성 (427년 ~ 668년)
정치체제
군주제
인구 최대치
668년69만호 (약 3,500,000명)
성립
기원전 37년
멸망
668년
초대 군주
동명성왕
기원전 37년 ~ 기원전 18년
최후 군주
보장왕
642년 ~ 668년
성립 이전
부여
해체 이후
발해, 신라
생애
292년, 서천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심이 많았다고 한다. 왕위에 오른 봉상왕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숙부인 안국군(安國君) 달가(達賈)를 음모로 살해하였다.
또한 293년에는 동생 돌고(咄固)에게 역모죄를 씌워 자살하게 하였으며 도망친 돌고의 아들 을불(乙弗)을 추격하게 하였다.
음력 8월에 모용외(慕容廆)가 침입하였다. 이에 봉상왕은 신성으로 대피하려 하였으나 적이 추격해 왔다. 이때 신성의 재(宰)인 북부 소형(小兄) 고노자(高奴子)가 500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을 맞이하러 나왔다가 모용외의 군을 만나 격파하였다. 봉상왕은 고노자를 대형(大兄)으로 삼고 곡림(鵠林)을 식읍으로 주었다.
296년 음력 8월 모용외가 다시 침입하여 고국원(故國原)에 이르러 서천왕의 무덤을 파헤치고 돌아갔다.
294년에는 국상 상루(尙婁)가 죽어 남부의 대사자(大使者) 창조리(倉助利)를 후임으로 임명하였다.
또한 296년, 모용외가 물러간 후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아 모용외를 방비하게 하였다.
298년 음력 9월에 흉년이 들었으나 궁궐을 증축하는 공사를 강행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높았다. 봉상왕은 신하들의 간언을 듣지 않고, 백성들을 살피지 않았다.
300년에도 흉년이 들었으나 다시 궁궐을 증축하니 백성들이 흩어졌다. 이에 국상 창조리가 왕에게 백성을 돌볼 것을 간언하였으나 봉상왕은 오히려 왕권의 지엄함을 역설하며 창조리를 위협하였다.
이에 창조리는 여러 신하들과 모의하여 봉상왕을 폐위하고 을불을 맞이하여 왕으로 삼았다. 봉상왕은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두 아들과 함께 목을 매 자결하였다. 봉상의 들에 장사지내고 왕호를 봉상이라 하였다.
동시대 백제, 신라
고구려 왕 계보도 (삼국사기에 의거)
해모수═╤═유화부인(하백의 딸)
│
소서노═╤═ 1.추모(bc37~19)═╤═예씨부인
│ │
┌┴┐ 2.유리명왕(bc19~ad18)═╤═송양왕의 딸
비류 온조 │
┌─┬─────┬────---┬────-┼─────------┐
도절 해명 3.대무신왕(무휼) 여진 4.민중왕(해색주) 재사═╤═부여태후
(ad 19~ 44) (44~48) │
갈사국왕녀═╣ ╠═ 원비 ┌──────┼─────---┐
호동 5.모본왕(? ? ? ). 6.태조왕(궁) 7.차대왕(수성) 8.신대왕(백고)
(49~53) (54~146) (146~165) (165 ~ 179)
┌┴┐ │ │
막덕 막근 추안 ㅣ
┌────────---┬───────────┬────────────── ┴─--┐
9.고국천왕(이이모) 발기 ╔═10.산상왕(연우)═╤═후녀(주통부인) 계수
(179~197)║ ║ (197~227) │
╚ 우씨왕후(우소의 딸)═══=====╝ 11.동천왕(교체)(227~248)
┌────────────────────--┼──┐
관나부인(장발미녀)══12.중천왕(연불)(248~270) ═╤═연씨왕후 예물 사구
│
┌───────┬───────────────------┴───┬──┬──l
(??) 13.서천왕(약로)(270~292) ═╤═우씨왕후(우수의 딸) 달가 일우 소발 공주(?)══명림홀도
┌──────────--┴───-─┐ (부마도위)
14.봉상왕(상부)(292~300) 돌고
┌┴┐ │
(?) (?) 15.미천왕(을불)(301~331)
├───────────┐
16.고국원왕(사유)(331~371) 무
┌────────┴────┐
17.소수림왕(구부)(371~384) 18.고국양왕(이연)(384~391)
│
19.광개토대왕(담덕)(391~412)
│
20.장수왕(거련)(413~491)
├──────┐
조다 승천
│
21. 문자왕(나운)(491~519)
┌──────────────────┴─────┐
22.안장왕(흥안)(519~531)══한씨미녀 23.안원왕(보연)(531~545)
│
24.양원왕(평성)(545~559)
│
25.평원왕(양성)(559~590)
┌────────────┼───────────┬──┐
26.영양왕(원)(590~618) 27.영류왕(건무)(618~642) 태양 평강공주══온달
│ │ (부마도위)
환권 28.보장왕(보장)(642~668)
┌──┬──┼──┬──┐
복남 임무 덕남 덕무 안승
자살,타살 등 일찍 죽은 왕자 타살된 왕, ══ 부부관계 |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재사(再思)는 2대 유리왕의 아들이자, 6대 태조왕의 생부입니다.
.왕족인 고추가(古鄒加) 돌고(固, ?~293)는 13대 서천왕의 차남으로 형인 14대 봉상왕에 의해 죽음을 당합니다. 15대 미천왕의 생부입니다.
. 장수왕의 아들인 조다(助多)는 생부인 20대 장수왕이 413~491년 오래 재위하는 바람에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먼저 죽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아들이 21대 문자왕(文咨王/?~519)으로 즉위하였습니다.
BC 2333년 고조선 건국
BC 108년 고조선 멸망.
BC 37년 부여의 왕족 주몽, 남하하여 졸본에서 고구려건국
BC 18년 주몽의 아들 온조(소서노와의 아들) 백제건국
003년 유리왕(주몽의 첫째부인 아들) 압록강 국내성으로 천도.
022년 고구려, 부여 공격 대소왕 전사.
242년 고구려, 요동의 서안평 공격
313년 고구려, 낙랑군 멸망시킴
391년 광개토왕 즉위, 백제공격
400년 광개토왕, 비려 후연 부여 말갈 정복. 내몽고까지 진출. 신라침범 왜구 격퇴.
414년 장수왕 즉위
427년 평양천도, 한강유역 정복
433년 백제-신라 동맹
475년 고구려, 백제공격 백제 웅진천도
554년 백제-신라 동맹 결렬
590년 고구려 온달장군 아차성에서 전사
598년 수나라와 1차전쟁 승리, 고구려 강이식 요서선제공격, 수문제 30만 대군궤멸.
612년 수나라와 2차전쟁 승리, 수양제 요동성,평양성,살수대첩에서 을지문덕에 패퇴
613년 수나라와 3차전쟁 승리
618년 수나라와 4차전쟁 승리, 수나라 멸망시킴
618년 이세민 당나라 건국, 고구려-당 우호관계맺음
630년 부여성-발해에 이르는 천리장성 축조
642년 연개소문 고건무 죽이고 쿠데타, 대당 강경노선으로 급선회.
642년 연개소문, 신라 김춘추를 사로잡아 감금하고 신라공격.
645년 당나라와 1차전쟁 승리, 요동성전투 연개소문. 안시성전투 양만춘.
647년 당나라와 2차전쟁 승리, 연개소문.
648년 당나라와 3차전쟁 승리, 연개소문.
648년 신라-당나라 연합
660년 신라-당나라 연합군 백제 멸망시킴
661년 당나라군 평양성 포위했으나 패퇴.
666년 연개소문 병사. 세아들 내분. 남생 당에 투항, 남건 설인귀에 대패.
668년 당나라군, 안시성 부여성 함락. 신라 문무왕 평양성 함락. 고구려 패망.
669년 압록강 이북 32개성 당나라와 계속 전쟁 - 검모잠등
676년 고구려 마지막왕 보장왕 말갈과 연합 고구려부흥운동 실패.
696년 거란 이진충 반란, 북경포위 측천무후와 전투끝에 패퇴.
696년 걸사비우,대걸중상,대조영 이해고의 당나라군과 격전, 요동에서 당축출. 걸사비우 전사.
698년 대조영, 진국이라 칭하고 건국. 송화강 연해주까지 정벌.
713년 당나라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칭하며 화친 제의, 대조영은 고려국왕 연호사용
719년 대조영 죽음.
732년 고려국(발해) 무왕 당나라 산동반도 공격.
733년 신라-당 연합군 고려국(발해)공격, 발해-돌궐-일본과 동맹. 나-당에 대항.
907년 당나라 멸망.
926년 고려국(발해) 멸망.
935년 신라 멸망.
제14대 봉상왕 실록(?~300, 재위 292년 3월-300년 9월 , 8년 6개월)
폭정을 일삼는 봉상왕과 창조리 반정
서천왕 사망 후 성정이 포악하고 사치를 일삼는 봉상왕이 즉위하면서 고구려 조정은 난국을 맞는다. 더구나 선비족 모용부의 강성으로 전란에 휘말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암흑기로 치닫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상왕의 폭정은 멈추지 않는다.
봉상왕은 왕후 우씨의 맏아들로 아름은 상부(혹은 삽시루)이며 언제 태어났는지, 태자는 언제 책봉되었는지 기록이 없다. 또한 왕위에 오른 시기도 정확하지는 않으며 숙부인 달가를 죽인 292년 3월에 왕위에 오른 것으로 판단된다. 그는 어려서부터 교만하고 방탕하며 의심과 시기가 많은 인물이었다. 그 같은 성품은 왕위에 오른 후에도 친족 살해도 서섬치 않는 악랄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왕위에 오른 후 탈상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안국군 달가를 살해하는데, 그는 숙신 정벌 공로로 안국군에 임명되어 행정 및 군사에 관한 직책을 수행하였으며 숙신과 양맥지역 자치구를 다스리는 탁월한 정치력과 덕망으로 잘 이끌어 백성들의 신망이 높았다. 봉상왕은 태자 시절부터 달가의 명망을 시기하고 질투하다가 왕위에 오르자 달가에게 역모죄를 씌워 죽인 것이다.
폭정을 일삼는 왕에 의해 충신 달가가 살해되자 불안감이 증폭되면서 민심은 이반으로 나타났다.
선비족 모용외는 고구려의 이러한 정치적 불안정을 틈타 293년 8월 군사를 이끌고 평양성으로 밀려들었다.
선비족 모용외의 급습을 받은 고구려는 봉상왕을 북방의 신성으로 대피시키고 수성전을 준비했다. 이에 모용외는 말머리를 돌려 신성으로 봉상왕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선비족의 기병대가 봉상왕 행열을 거의 가까이 따라왔을 때 신성의 관리로 있던 북부의 소형 고노자는 급히 군대를 몰아 봉상왕을 맞이하는 한편, 기병 5백을 동원하여 뛰어난 전술과 통솔력으로 모용외 기병대를 괴멸시키자 패퇴하여 물러났다.
모용외의 군대를 물리쳤다는 소식을 들은 봉상왕은 고노자를 대형으로 높여주고 곡림을 식읍으로 내려 전공을 치하하고 다시 평양성으로 돌아왔다.
환궁한 봉상왕은 백성들이 불안해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이는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요인이 되고 급기야는 전장터에서 명성을 날리던 자신의 친동생 돌고를 모반혐의를 씌여 자결명령을 내려 자결하게 한다. 이 때 돌고의 아들 을불은 시골로 도망가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면서 몸을 숨긴 덕에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그러자 민심은 더욱 흉흉해지면서 민간에 나라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조정의 버팀목이었던 국상 상루가 죽자 봉상왕은 남부 대사자 창조리를 국상에 임명하고 작위를 대주부로 격상시켜 준다.
창조리가 국상에 올라 민심을 수습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봉상왕에 대한 백성들의 민심이반은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던차, 선비족 모용외는 296년 8월에 다시 군대를 이끌고 재차 고구려를 침입했다. 모용외는 일사천리로 변방을 통과하여 고국원에 도착했다. 모용외는 그곳에서 서천왕의 능을 발견하고 파도록 지시했다.
이 때 부랴부랴 출동한 고구려군이 풍악을 울리면서 달려오자 모용외는 무덤속에서 풍악이 울리면서 갑자기 병사들이 죽어 넘어지자 귀신이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겁을 먹고 도망하여 달아났다고 한다.
선비족의 침입에 놀란 봉상왕은 선비족의 침입을 막을 방안을 찿도록 조정 대신들에게 지시했다. 이에 국상 창조리가 신성의 영역을 대폭 확대하여 북부 대형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삼아 변방을 지키도록 건의했다.
이에 봉상왕은 고노자를 신성 태수로 임명하고 선비족의 침입을 방비토록 했다. 고노자는 백성들에게 신망이 높았으므로 변방을 안정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고 군사들의 사기도 드높았다.
고노자의 능력에 힘입어 변방은 안정시켰지만 조정의 어려움은 계속되었다. 298년에는 추수 전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한 해 농사를 망치고 굶주리는 백성들이 늘어나고 국가 재정은 바닥나고 있었다. 그런대도 봉상왕은 궁실을 증축하는 등 국고를 탕진시키고 있었는데, 백성을 부역에 동원하고 강제로 세금을 징수했다.
만주, 길림성 집안, 고구려 환도산성(丸都山城) 아래 피라밋군락,
이러한 봉상왕의 사치와 향락을 위한 국고 탕진은 점점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조정 대신들이 누차에 걸쳐 궁실 증축을 재고하자고 건의했으나 봉상왕은 듣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누군가 모반을 일으킬 것이라는 불안감에 돌고의 아들 을불을 죽이기 위해 전국에 군사를 풀었으나 그는 잡히지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자연 재앙이 연이어 닥쳤다.
299년에는 지진이 일어나 많은 민가가 파괴되었으며 사람들이 죽었다. 이듬해 정월에 다시 지진이 일어났으며 2월부터 7월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 가뭄이 계속되자 백성들이 유랑민이 되고 먹을것이 없어 서로 잡아먹는 일이 발생했다.
이런가운데도 봉상왕은 사차와 향락은 그칠줄을 몰랐으며 국상 창조리는 직언을 하였으나 되려 국상을 죽이겠다는 폭언도 서섬치 않자 창조리와 조신들은 더 이상 방치하였다가는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판단하고는 반정을 계획하여 300년 9월 드디어 반정을 감행하였다.
창조리는 군사를 일으켜 궁성의 호위군을 제압한 다음 봉상왕을 붙잡아 별궁에 가두었다. 이렇게 되자 봉상왕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알고 자결하였으며, 그의 두 왕자도 함께 자결하였다. 이로써 봉상왕의 폭정은 종결을 고하게 된다.
창조리는 반정을 도모하기 전 미리 왕자 을불의 얼굴을 아는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찿게 했다. 을불은 민가에서 머슴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물어물어 찿아온 사람에 의해 을불임이 확인되었고 마침내 반정에 성공하자 어렵게 찿아낸 을불을 받들어 봉상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의 왕위를 잇게 했다.
머슴에서 고구려의 왕으로 등극한 사람이 바로 미천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