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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과 변화/우리들의 슬픔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한겨레프리즘]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박용현

한겨레프리즘
한겨레 박용현 기자
» 박용현/24시팀장
1. 소년의 신앙심은 마더 테레사보다 굳셌다. 적어도 “예수님은 당신을 특별히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침묵과 공허함이 너무 커서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 해도 들리지 않습니다”라는 고뇌는 없었으니까.
 

2. 평생을 빈자의 어머니로 살았고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될 테레사 수녀에게조차 신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주지 않았다니, 신은 도대체 누구에게 현현하는 것일까. 신의 존재를 찾아, 신의 이름이 유독 드높고 신에게 영광 돌리는 소리가 심상찮게 우렁찬 곳으로 눈을 돌려본다.

 

이랜드그룹. 회장의 신앙이 종교 생활을 넘어 ‘기독 경영’이라는 지표로까지 우뚝 섰다. 비정규직 대량 해고 탓에 시민단체들은 ‘나쁜 기업’이라고 부른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 서울시장 재임 시절 서울을 통째로 하나님께 봉헌했다. 국외선교단체들. 아프가니스탄에서 ‘공격적 선교’가 펼쳐졌고, 납치사건이 일어났다. 온 국민이 인질이 됐다. 기독교계 사학들. 의무교육을 받으러 ‘배정’됐을 뿐인 학생들에게 종교 수업과 의식을 강요한다. 재단의 투명성을 위한 법 개정엔 죽기살기로 반대한다. 대형 교회들. 대성전 건축은 지상 목표다. 때론 목사 세습 문제로 시끄럽다. 저들은 신의 존재에 추호의 의문도 갖지 않을 것 같다. 신은 테레사 수녀보다 저들을 더욱 특별히 사랑하는 것일까.

 

3. 소년의 굳센 신앙심에 금이 간 것은,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이 계기가 됐다. 늘 열려 있던 교회의 쪽문이 언젠가부터 닫히기 시작했던 것. 가끔 교회 안 벤치에서 밤을 보내던 노숙인(당시엔 그저 ‘거지’라고 불렸다)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됐다. 몇년에 걸친 특별 헌금 모집으로 지은 반짝이는 새 교회였다. 예수는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가복음 10:21)고 했거늘, 소년이 생각해 보니, 교회에서 배운 덕목엔 “예수 믿으라”고 대로에서 외치는 용기는 있을지언정 낮은 곳에 눈 돌리는 사랑은 없었다. 소년이 세상에 눈뜬 80년대, 그 암울한 독재의 시대에 하늘나라의 안식만 되뇌는 교회는 소년에게 또 하나의 쪽문을 닫아버렸다. 로마의 식민지배 속에 핍박받던 유대인들을 긍휼한 ‘인간’ 예수를 더 사랑하게 되는 만큼 ‘신’으로서의 예수는 저만치 멀어져 갔다.

 

이제 나이든 소년은 마더 테레사의 고백을 접하며 다시 생각해 본다. 신의 거처는 어디인가. 테레사 수녀가 평생을 기도와 봉사로 헌신한 빈민굴이 아니었던가. 문 열린 낡은 교회 안 벤치가 아니었던가. 버트런드 러셀이 세속적 고통을 외면하는 교회의 논리에 일침을 놓으며 한 말도 되새겨본다. “기독교인들은 세상의 고통은 죄를 씻기 위한 것이며 따라서 좋은 것이라고 흔히 말한다 … 나는 언제 한번 누구든 기독교인을 병원의 아동 병동으로 데려가볼 생각이다. 거기서 고통을 견디고 있는 아이들을 똑똑히 목격하게 한 다음, 이 아이들은 도덕적으로 버려졌으니 고통 받아 마땅하다는 예의 그 주장을 계속 해보라고 하고 싶다.”

 

가난과 질병으로 아픈 아이들을 위해 모든 교인이 팔을 걷어붙이는 교회, 새 성전을 지을 기금을 허물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교회…. 그런 소식이 저 ‘기독 경영’과 ‘서울 봉헌’과 ‘공격적 선교’ 따위의 뉴스를 대체하는 복음으로 들려올 날을 갈망하며 기도한다.

 

4. 어릴 적 그토록 사모했던 신이여. 정녕 당신이 계신다면, 낮은 곳에 임하시어 핍박받는 이들에게 역사함으로써 당신이 계심을 알게 하소서.

 

*이 글의 제목은 러셀의 강연 제목에서 따왔다.